BULSIK / ⟪천수경⟫ 이야기 #5 "왼 손으로 지혜를 구하고 오른 손으로 중생을 구하고 2"

지난 번에 10원을 이야기 했다. 그리고 10원이 4홍서원에 다름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했다. 우리가 읽고 있는 ⟪천수경⟫은 100여년 전에편집된 경전이다. 최근에 편집되었다는 것은 지금의 일반적인 상례와 아무래도 조금은 더 가깝다는 말일 것이다.

물론 구조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 컨텐츠들은 다양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사실 숨어있는 의미들을 해석해보니 그 기도의 대상이 사실은 부처님만은 아니더라는 것이다. 이른바 우리가 ⟪신묘장구대다라니⟫라고 잘못(?) 부르고 있는 ⟪대비주⟫는 산스끄리뜨로 쓰여진 것이다.

‘대비大悲’란 관세음보살을 가리키는데 그런데 거기에 나오는 주 인공들을 따져보니 사실은 힌두교도 들이 믿는 쉬바Shiva신이더란 것이다. 그렇다. 종교의 체제와 분별심을 내려놓으라고 배우는 불자들에게 어떤 신에게 기도하든 뭐 큰 문제가 되겠는가마는, 힌두교의 신들은 적들에게는 매우 가혹한 이들이다.

그들이 적들에게 가혹은 이유는 없다. 그들이 가혹한 이유가 누군가에게 위해를 가하기 때문에 처벌이나 안보를 위한 목적은 아니다. 그냥 적이기 때문이다. 인도신화에서 선신(deva)들의 적 중 대표적인 이들은 아수라이다. 우리가 아수라를 잔혹한 이들, 호전적인 이들이라고 정의하는데 맞춰보면, 선신들은 결코 선신이 아니다. 신들의 전쟁은 다만 악에 대항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태생부터 선신과 악신은 전쟁과 전투로부터 그들의 역사를 시작한다. 싸움은 필연적일 뿐, 어떤 그럴듯한 명분따윈 없다. 그리고 편들기 좋아하는 우리는 그냥 정의의 이름으로 선신(deva)의 편을 들 뿐이다. 그러고 보면 devil이란 어휘가 악신이 되어버린 것도 신기한 일이다.


그래 서 불교는 그 ‘적’들에게 자비를 베풀자고 하면 - 자비무적慈悲無敵이니까 - 그러나 나쁜 ‘적’들에게 자비를 베푼다고 하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큰일날 소리다. 적을 죽이는 것이는 것이야 말로 그들의 본분인 법dharma이고, 그것을 통해서 존재의 의미인 그 패권이유지되는것이고, 또한 그것이 바로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그것은 진리이므로 제3자가 나서서 그것은 ‘진리’‘진리가 아니다’ 하고 새로운 잣대를 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누구의 편을 들었을까? 어떻게 했을까? 그냥 ‘적’이란 의미를 그대로 두고 ‘아수라’에서 ‘번뇌’로 대상을 바꿔버렸다. 그리고 하던대로 계속 적과 싸우라고 말씀했다. 그래서 원래 불교에서 가장 높은 단계의 성자인 아라한 arahant은 한문으로 번역할 때 ‘살적殺敵(적을 죽임)’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산스끄리뜨에서 ‘han’은 ‘죽인다’ 는 의미이다. 참, 어쩌면 부처님은 매 우 전략전술에 뛰어나면서 동시에 정치적인 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서 불교에서 아수라는 신화에 나오는 그 아수라가 아니라 '번뇌'의 상징이다. 아 평화가 아니라 계속 싸우라고 했다니.

말이 길어졌는데, 그래서 ⟪대비주⟫를 읽지 말자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러니 원래 내용만 보면 안 읽어야 하는게 맞고, 부처님 방식에 따라 고친대로 대상만을 바꾸면 읽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다만, 늘 강조하는 말이지만, 그래서 무조건 따라 하지말고 묻고 따지고, 꼼꼼히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만원짜리 물건 하나 살 때도 고민하는데, 긴 인생의 지침방향을 불교로 선택하면서 왜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가. 불교는 모든 선택도 자유지만, 그 책임도 스스로 져야 한다. 애프터 서비스가 안되는게 불교다. 부디 스스로가 비판적인 시작으로 질문하고 따져야 하기를 권장하는 바이다.


准提功德聚 寂靜心常誦
一切諸大難 無能侵是人
天上及人間 受福如佛等
遇此如意珠 定獲無等等

쭌디보살의 공덕을 얻기 위해 쭌띠 보살의 진언을 항상 읽으면,
모든 큰 어려움도 그를 어찌 할 수 없고,
세상의 신들이나 사람들이 그를 부처님과 같이 존경하니,
마치 모든 소원을 이루게 되어 안정적으로 [원하는] 것을 얻게 되리라.


⟪천수경⟫ 이야기 연재에서 이미 소개햇지만, ⟪천수경⟫의 주인공인 관세음보살은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데 중생세계인 6도에 각각 다른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중 '준제'는 원래 이름이 '쭌디'이다. 우리나라에선 그닥 인기가 없지만, 일본불교에서는 제법 인기있는 이 쭌디관음은 6도 중 인간계를 담당하기 때문에 ⟪천수경⟫에서 유독 인기가 있다. 그는 천수경 마지막 발원문이 나올 때 다시 등장한다.


이 쭌디관세음보 살의 주문을 읽으면 한없는 공덕이 된단다. 앞에서 ⟪대비주⟫이야기를 귀 담아 듣고 이해하셨다면 굳이 설명 할 필요가 없겠지만, 정답은 믿거나 말거나이다. 모든 현상은 믿는 사람에게는 사실이 되니 믿고 도움을 얻든, 믿지 않는 이에게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으니 굳이 힘써 읽을 필요도 없다.

경험상의 팩트를 말씀드린다면, 그걸 열심히 제대로 읽어서 없던 복을 받은 사람이나, 안믿고 안읽고 있던 복을 못받은 사람이나 그런 이들에 대해 필자는 본 바도, 들은 바도 없다.

눈 앞에 값지고 비싼 물건,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필요한 사람에게는 가치고 있을 것이고, 필요없는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도없다. 좋은것이 있어서 갖다 놓았으면 누군가는 가져갈 것이고, 누군가는 갖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갖다 놓았으면 그만이지 가져라 갖지말라 간섭할 필요도 없고, 그 어떤쪽이 좋고 나쁜 것도 아니다. 그냥 하고싶은대로 하면 된다.


⟪천수경⟫을 공부하려는 사람은 아마도 필요해서거나 최소한 궁금해서일 것이니 그 쭌디관세음보살의 진언이 무엇인지 소개는 해 둔다.

准提眞言 / maha cundī dhārāṇi
나무 사다남 삼먁 삼못다 구치남 다냐타 옴 자례주례 준제 사바하 부림


‘⟪쭌디다라니⟫’이것이 ⟪준제진언⟫ 이라고 부르는 원래의 명칭이다. 진언의 내용도 중국식으로 발음을 쓴 산스끄리뜨문장을 다시 한국식으로 여러번 읽다보니 약간 달라진 것이 고, 원래 원음은 다음과 같다.

나마하 삽따남 삼약삼붓드하 꼬띠남 따드야타 옴 짤레 쭐레 쭌디 스와하
namaḥ saptānāṃ samyaksaṃbuddha koṭīnāṃ tadyathā oṃ cale cule cundī svāhā

아 발음이 많이도 달라졌다. 읽을 사람은 읽어도 나쁠것은 없지만, 다만 21번이니 108번이 니 그렇게 읽을 필요는없다. 많아도 3번의 반복이면 차고 넘친다.

南無七俱脂佛母大准堤菩薩
칠억 부처님의 어머니 쭌디관세음보살에게 예경을 표합니다.

구지俱脂란 꼬띠koṭi란 산스끄리뜨의 음사어로, 억, 조 등의 높은 숫자단위를 의미하는데, 이는 다만 상징이고, 부처님의 어머니란, 불교에서 지혜와 자비를 부처님의 존립근거로 보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생물학적 부모를 따지는게 아니라 반야지혜와 중생을 향한 자비가 부처님을 탄생시킨다고 믿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보다 아래에 두는 보살이지만, 사실은 수많은 부처 님들의 어머니가 6도 중 인간계를 담당했던 쭌디관세음이라는 것이고, 때문에 그 분을 생각하는 것이 큰 공덕이 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상징적으로는 또한 불상을 조각하거나 불화를 그리는 장인들도 불모佛母라고 불린다.


我今持誦大准提
卽發菩提廣大願
願我定慧速圓明
願我功德皆成就
願我勝福偏莊嚴
願共衆生成佛道
내가 이제 준디관세음의 위대한 주문을 항상 지니고 읽으니
곧 지혜의 깨달음과 중생을 향한 자비의 큰 계획을 세웁니다
원컨대 완전하고 분명한 선정의 고 요한 마음과 지혜를 얻어서
원컨대 모든 복을 지어 모든 것을 이루기를
원컨대 위대한 복을 짓고 모든 준비를 갖추어
원컨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깨달음을 이루게 되기를


복을 왜 왜 위대하다고 하는가 하면 결국 혼자 잘먹고 잘살기 말고, 내가 한편으로는 깨달음을 얻고, 한편으로는 그 깨달음의 지혜를 고통받는 이들과 나누겠다는 것이다. 공덕이란 결국 복을 짓는 것이다.

안도현의 시 ⟪너에게 묻는다⟫도 있지 않은가.

“연탄재 함부러 발로 차지 말라. 그대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 운 사람이었느냐”

그게 공덕이다. 그 대상이 가족이라도 괜찮다. 그 아우라를 넓혀가다 보면 언젠가 관계없는 이들에게도 뜨거울 수 있겠지. 그게 ‘전혀 연고없는 이들을 가족처럼 대하는 무연자비無緣慈悲’다. 모든 대상을 가족같이 대하느냐의 여부가 ‘사랑’과 ‘자비’의 차이다. 불교에서 ‘무 연無緣’이란 인연이 없으니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인연’이란 관념 자체를 내려놓는 것이다.


내가 먼저 깨달음을 얻었으니 끝이 아니다. 대개 사람들은 수행이나 수양의 목표를 자신으로 삼는다. 어떤 하찬은 이들보다 훨씬 인격적으로 나은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틀렸다. 내가 훌륭해지는게 아니라 그냥 모든이들 가운데서 함께 살 수 있어야 그게 부처다. "돈을 많이 벌어서 남을 펑펑 도와야지" 하는 생각만큼 바보같은 생각이 있는가. 그냥 지금 있는 걸 나누는 것이 복을 짓는 것이다. 복을 짓는데 주는 이와 받는 이가 있으면 이것도 에러다. "나눈다"가 좀 낫다. 모든 이들이 내가 경험한 이 깨달음의 세계를 공유하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것.

“원컨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모두 편안함을 얻기를”

이 모든 것들이 준제진언을 외어서 가능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준제진언은 다만 우리가 이 위대한 삶을 살기를 결심하라고 말해주는 비망록에 불과하다. 앉아서 저걸 백번, 천번 만번씩 죽도록 읽으면서 주력을 얻었느니 가피를 입었다느니, 남들이 보지 못한 다른 경계를 체험하고 어떤 경지에 올랐다고 구라풀지는 말자. 플랭클린 플래너에 미래의 다짐을 새겨넣는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도구이지 거기에 여러번 써놓고 형광칠로 강조한다고 그것이 이루어지는가.

불교가 말하는 철학을 배우고, 모두에게 힘든 이 삶에서 서로 지원하고 나누고, 좀 더 나은 (공생하는) 삶을 살려고 애쓰는 것. 혹은 좀 더 내려놓아서 좀 더 많은 것들이 누군가에게 나누어질 수 있는 것, 그냥 그런 것이 가치있는 것이라고 준제진언은 말하고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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