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LSIK / ⟪천수경⟫ 이야기 #3 "참회, 허물에 실체가 있는가" 1/2

불교도 하지말라고 가르치는게 참 많다. 입문하면서 기본적으로 5계를 받아야 하고, 특별행사 때 여기 3종을 추가해서 실천하는 ‘8관재계’. 아마 팔관회八關會라고 들어봤을 것이다. 고려시대에 일종의 국가차원의 행사였다. 그렇다. 불교는 한 때 한국의 국가적 종교였다. 나라의 모든 이들이 불교철학을 삶의 가치로 생각했다는 것인데, 글쎄 고려말에 그렇게 어이없이 무너진 걸 보면 반드시 조선건국의 일방적인 정치공세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인지만. 아무튼 팔관회란 8관재계를 지키는 행사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서유기⟫에서도 이와 관련된 사건이 있다. 손오공 삼형제 - 출신은 달라도 - 는 원래 모두 법명이다. 불교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모티프로 한 작품이니 당연하지만서도.

공의 사상을 깨달으라고 오공悟空
깨달음의 가능성, 오능悟能
오롯한 깨달음, 오정悟淨

이다. '오능'이는 이렇게 번듯한 법명이 있는데 왜 또 팔계八戒란 법명을 받았을까. 돼지로 표현된 - 마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음식에 탐욕을 느끼다가 돼지로 변해버린 이들의 이미지처럼 - 그에게 계율을 통해 스스로를 컨트롤 하라는 사명이 주어지고 거기에 이 팔계 - 팔관재계 - 란 이름이 하나 더 주어진다. 주지하다시피 팔계는 원래 돼지는 아니었다. 다만 돼지뱃속으로 잘못 떨어졌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천상에서 음식을 훔쳐 먹은 벌로 지상추방의 벌을 받았기 때문이다.


초임(?)혹은 예비(?)스님이 되면 주어지는 사미계‘10계’, 완전한 스님(?)이 되면 주어지는 ‘250계’. 여성은 출가하면 무려 ‘348계’. 그리고 대승의 보살로 살아갈 이들에게 주어지는 ‘10가지 중대한 계’에다가 사소한 계율 ‘48계’.

부처님이 열반하실 때 그 똑똑한 제자 아난다에게

"소소한 계율들은 버려도 좋다"

는 말씀은 큰형님 카샤파가 '소소'란 정확히 무엇이냐란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덕에 완전히 묵살되었지만, 그 명분은

"부처님 말씀은 소중하니까"

로 포장 되었다. 하지만 8, 10, 250 혹은 348, 10중, 48경... 이 수많은 항목들이라니. 이후의 '유식'이란 학문을 하는 불자들에 의해 그 계율이 얼마나 깔끔하게 정리되었나 보자.

하지말아야 할 것, 지지계止持戒
해야 할 것, 작지계作持戒
중생을 위한 행위, 요익중생계饒益衆生戒


불교의 철학은 항상 규칙을 최소화했다. 그러나 워낙 여러사람이 살다보니 이런저런 개인적인 규율, 사회적인 원칙들이 만들어졌고, 그것을 강조하다보니 규정화되고 문서화 되었다. 그러나 불교의 계율이란 특정한 부정적 상황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처를 통해 그런 상황들로부터 심신이 자유로워지는 것이 목표다.

불교는 수없이 많은 사람의 실수를 인정한다. 그리고 그 죄책감으로 시달리지 말고 빨리 벗어나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고 할 뿐이다. ‘지계청정持戒 淸淨'이란 말은 계율을 잘 지켜서 내가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실수로 저지른 사건들로부터 빨리 마음이 자유로워지고 가벼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저지른 잘못 때문에 나란 존재가 오염되고, 잘못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란 존재가 깨끗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수없이 많은 잘못과 허물로 시간을 보내고 후회하는 그 모습이 오늘날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의 모습 아닌가. 그 스스로를 더럽다고 자책하고 괴롭히는 것이 깨끗한 행위일 수 있을까.


  • 殺生/다른 생명을 상하거나 죽이는 것
  • 偸盜/남의 소유물을 마음대로 하는 것
  • 邪淫/누군가에 게 상처가 되는 이성간의 애정
  • 妄語/잘못된 말
  • 綺語/악의가 있는 거짓말
  • 兩舌/이중적인 말
  • 惡口/상처를 주 는 말
  • 貪/무리하게 욕심내는 마음
  • 瞋/혐오
  • 癡/총체적인 어리석음

重罪 今日懺悔/의 중대한 잘못을 오늘 참회합니다.


이른바 '십악참회十惡懺悔.


왜 ⟪천수경⟫을 읽으면서 이 대목에 대해서 누구도 반문하지 않는지 그걸 묻고 싶다.

"참회하면 깨끗해 지나요? 아니면 내가 잘못했으니 받아도 싼 부담을 지고 살아야 하나요?"


잘못을 저지르면 물론 응당의 벌을 받아야 될 것이다. 그 잘못을 범하는 동 안 누군가는 물리적 피해를 입거나, 기회를 놓치거나, 혹은 심리적 상처를 받 았을테니. 그러나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밉다고 - 이게 여기에 적절한 비유인가 싶기도 하지만 - 가만히 생각해보라. 마치 나는 누군가의 그런 허물을 저지르지 않고 사는 것 처럼 앞서서 윤리적인 잣대를 엄격하게 들이대고 비난하고 있지 않은지. 사회적인 잘못에 대한 법적인 처벌을 이미 받은 이들에게도 우리는 그가 잘못했으므로 욕먹는게 당연하다고 손가락질 하는데 익숙하다. 그러나 불교는 '나쁜 행위'는 인정하지만 '나쁜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직 '나쁜 행위'가 있을 뿐 '나쁜 사람'은 없다.

우리는 누군가를 비난하며 새로운 악업을 만들어 낸다.

불교의 계율에는 엄격하게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의 원칙이 적용된다. 만약 승단 구성원 중 누군가가 잘못했을 때 그 잘못에 해당하는 처벌을 받고 난 이후 누군가가 그 벌이 적절치 않다거나, 이후에 그의 잘못을 재차 들춘다면 오히려 그 문제를 제기한 이에게 새로운 처벌이 주어진다.


물론 여기서 변명을 좀 하자면, 요새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정치적인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이 원칙을 적용하기 좀 어렵지 않나하는 개인적인 느낌은 있다. 우리가 지금 논의하는 것은 대부분의 우리 일상에서 개인 대 개인의 문제들에 대한 논의를 하는 것이다.


불교는 입口으로, 신체身로, 머리意로 짓는 세 가지의 업을 이야기 한다. 이를 3업이라고 하는데, 10악참회에서 보다시피 입으로 짓는 죄가 4가지로 가장 비율이 높다. '입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이란 사회적인 큰 문제에 있어서는 매우 용기있는 사람인 동시에 개인적 관계같이 작은 문제에 대해서는 대체로 타인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큰 나무를 한 번에 두 조각 내버리는 도끼로 절대 날아다니는 파리를 잡을 수는 없는것처럼, 어떤 스타일이 항상 옳을 수는 없지 않은가.주로 입으로 비난과 지적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은 작은 일에 있어서는 공보다 과가 많을 수 밖에 없게 된다. 대개 다투고 싸운다는 것은 스스로가 생각하는 옳음을 상대에게 관철시키는 것이니 항상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늘 다툼 속에 있게 된다. (2/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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