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LSIK / 이야기가 있는 불교 이미지 #006 "이국적인 탑, 외국인, 그리고 닮은 꼴" - 고려 경천사와 조선 원각사의 10층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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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_Jinho Jung, https://www.flickr.com/photos/phploveme/14683269858/in/photostream/


국립중앙박물관. 2005년에 새로 이전 개관하면서 경천사지 10층석탑을 1층의 메인으로 장식했다. 저 멀리 반대쪽인 입구에서 들어가면 금새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다가 가까이 가면 3층높이의 건물내부와 키를 맞대며 우뚝 서있는 모습이란 장중하기 이를데 없다. 한 때 고려의 수도 였던 개경(개성) - 조선시대에는 경기도에 속한 곳이었으나 현재는 북한의 황해도에 들어간다 - 에있던, 지금은 터만 남은 절,경천사敬天寺에 있던 독특한 모양새의 탑이다.


고려 출신 최초로 중국의 황후가 되었던 기황후는 마지막 황제 순제順帝와 함께 원나라의 최후를 맞이했다. 자신의 고국인 고려에 대한 지대한 애정과, 공민왕과 대립했던 고려왕실에 대한 적대시로 역사적인 공과가 엇갈리고 있다. 아무튼 근래에 우리에게 조금씩 알려지고 있는 그녀와 고려왕실의 힘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이 경천사지 10층 석탑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에서 사실 유례를 찾기 어려운 원나라의 양식이 가미된 독특한 형태의 탑이 완성된 것이다.


물론 탑의 양식만 그러한 것은 아니다. 원나라, 몽 골의 불교란 티벳의 영향권에 있었고 그런 불교의 형태가 고려시대 우리나라에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나라 불교의례에 상당부분은 - 물론 인도가 원형이고 중국을 통해 들어온 불교를 이런 표현으로 수식하기 엔 좀 애매하지만 - 분명 “이국적”이다. 일본 공사관이 고종에게 하사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고 이 탑을 해체하여 일본으로 가져갔다가 외신들로부터 대대적인 손가락질을 받고 다시 되돌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적극적으로 서구세계와 언론에 이 사실을 알렸던 이가 두 사람 있었으니 외국인으로서 우리나라의 항일운동에 지대한 역할을 했던 ⟨대한매일신보大 韓每日新報⟩ - Korea Daily News의 창간자인 영국인 기자 배설(E. 베델,1872~1909)과, The Korea Review의 편집 책임자로 항일운동에 동참했던 기자이자 선교사였던 할버트(B. Hulbert,1863~1949)이다.


고려시대 만들어진 시작부터 오늘날 국립중앙박물관 로비에 안치되기까지 그 800여년의 그 나이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이 탑은 원元나라와 고려高麗의 양식에,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조선朝鮮 으로 돌아왔고, 거기에는 영국인과 미국인의 결정적인 노력이있었다. 또한 고려라는 한 왕조를 거쳐 다음 왕조인 조선에 그 양식을 전해서 조선시대에 또 다른 탑을 만들게 되니까 참 그 옛날에 글로벌한 경험을 품고 있는 셈이다.


고려시대의 이 이국적인 탑은 자신과 꼭 닮은탑을 또하나 탄생시킨다. 이는 지명과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 탑골공원은 한 때 파고다공원으로 불렸다. 지금은 종로주변 어학원이나 옛날 극장이름을 기억할 때 떠오르는 이름이지만 파고다Pagoda란 포르투갈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을 의미한다. 탑을 산스끄리뜨sanskrit로는 스투파stupa, 빨리pali어로는 투파thupa라고 부르는데 예전 그 명칭을 한문에서는 ‘솔도파’ 혹은 ‘탑파’라고 옮기다가 오늘날은 ‘탑塔’이라 고 확정해서 부른다. 아, 물론 탑의 다른 이름으로 짜이띠야caitya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선 ‘지제’란 좀 낯선 번역으로 쓰이다가 오늘날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 하지만 동남아불교에서는 이 명칭을 많이 들어봤을 것 이다. 절을 가리키는 이름 중에 쩨디cedi는 가끔 절 이름으로 불린다.


서구사람들, 특히 처음으로 이 자리를 공원으로 기획했던 영국인 브라운Brawn에 의해 원각사터는 서구식 공원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파고다공원으로 불렀는데 그 파고다가 바로 이 원각사의 10층석탑을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란 것은 굳이 특별한 사실도 않을 것이다. 이후 1992년에 와서야 다시 ‘탑골’이란 우리식 지명으로 바꿔서 부르기에 이른다. 그러니 주변에 많은 상호명이 아직도 파고다-를 달고 있다.


무엇보다 이곳은 1919년 3월 1일에 <독립선언문>을 공식적으로 낭독한 장소로 대한민국의 건국이 시작 되는 뜻깊은 장소이기도 하니 물론 장소가 급히 바뀌 어서 민족대표들은 정작 다른 곳에서 선언문을 낭독 했다지만, 이곳은 우리에게는 의미가 있는 곳이다. 이 운동을 주도 했던 민족대표 33인은 모두 종교계 인사들이었고, 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에 비해 불교측 대표는 만해卍海스님과 용성龍城스님 단 두명이었으니 사찰과 탑, 그리고 종 이야기를 하는 이 마당에서는 좀 부끄러워지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그 한가운데 한국불교의 총본산으로 불리는 총무원과 조계사가 그 자리를 지금껏 유지하고 있으니, 항상 공사현장이 아닌 날이 없고 정치적으로 조용할 날이 없는 산만한 분위기 치고는 오래 버텨오고 있다. 그것이 부처님과 불자들의 덕이지 설마 엠프소리 타고 시끄럽게 울려퍼지는 권승들의 둔탁한 목탁소리의 은총(?) 덕분이겠는가마는.


이 주변이 오늘날 인사동仁寺이란 지명이 주어진 것은 원래 대사동이란 옛 지명 때문이다. 물론 그 대사大寺란 탑골공원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있던 원각사圓覺寺를 가리키는 말이다. 거기서 '사'자를 떼고 당시 한양 행정구역인 한성부의 중부 8방 중 하나인 관인방에서 '인仁'자를 떼어 지금의 인사동이란 지명이 만들어졌다. 오늘날은 낙원동樂園으로 불리는 곳, 거기서의 락樂도 그 공원을 가리키고 있지만 통합되기 전의 탑동塔, 종각동鐘閣이란 지명도 역시 원각사의 탑과 보신각종을 가리킨다. 보신각 종은 지금이야 새해 첫날 새벽 어둠을 걷는 제야의 종으로 여겨지지만 본디 원각사에 걸려 있던 종이다. 물론 진짜 보신각의 원각사 종은 국립박물관에 서 그 세월을 가늠하고 있다.


원각사의 자리에는 원래 고려시대 흥복사興福寺란 절이 있었다. 세조世祖가 이 절을 중창하고 이름을 원각사라고 붙이고, 오늘날의 보신각종도 그 때 주조한 것이다. 연산군燕山君 때 절을 폐사시키고 오늘날 국립국악원 정도에 해당하는 장악원掌樂院을 세우는 바람에 절이 사라졌다. 흥천사興天寺와 흥덕사興德寺와 함께 조선시대 서울시내 3대 사찰이었던 원각사는 그렇게 사라졌다. 흥興이란 주로 조선시대 왕실사원에 붙이는 이름인데, 흥천사는 불이 났으나 복원하지 못했고, 흥덕사는 원각사처럼 폐사되어 버렸으니 조선왕조 한양 도성내 3대 사원이 그 무렵 모두 사라져 버린 셈이다. 이 세 절의 폐사에 대해 역사는 모두 연산군에게 책임을 묻고 있으나 그에 대한 재평가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날 그 내막을 알려면 좀 더 연구해봐야 할 일이다.


원각사 종은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보신각普信閣에 안치되어 우리의 새해를 매년 장식하고 있다. 이쯤되면 예상되겠지만 그 앞 큰길의 이름이 종로鐘路 인 것도 보신각에 걸려있는 원각사종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 매년 새해 아침 우리가 듣는 보신각 종은 원각사에 걸려 있던 그 종은 아니다. 세월이 오래되면 아무리 무쇠로 된 단단한 종이라도 낡고 금이 가기 마련이니 보존을 위해서 원래의 종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하고 똑같은 모양의 종을 다시 만들 어 걸어둔 것이다. 매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함께하는 원각사 종소리와 3.1운 동이 시작된 탑골공원의 옛 절 원각사. 그리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탑. 그 원형인 경천사의 이 이국적인 석탑에는 이렇게 복잡한 이 야기들이 얽혀있다.


일본으로 잡혀갔던 탑과 먼 원나라에 공녀로 가야했던 기황후의 모습, 3.1운 동의 현장과 항일 운동에 참여했던 눈푸른 두 외국인의 활약. 그리고 그 현장과 인물들을 둘러싼 많은 이야기들은 원각사 탑과 경천사 탑의 그 닮은 얼굴 만큼이나 묘하게 오버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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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불식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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