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LSIK / 명문감상 #006 "당신이 지금 있는 그대로 부처님" - 무의자 혜심慧諶, “깨달음을 얻은이가 시를 보내왔기에 답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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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스승과 국가의 자문을 했던 이들을 국사國師, 왕사王師라고 했다. 우리나라 순천 송광사松廣寺는 한국불교의 3대사찰 중 하나라고 하는데 3대 사찰이란 불법승이란 삼보를 각각 대표하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국사시호를 받은 열여섯 스님들의 활동무대가 송광사였기 때문에 오늘날 송광사란 한국불교 의 삼보 중 승보를 대표하는 사찰이 되었다. 물론 이분들이 국사인 것은 왕으로부터 국사로 시호를 받고 추존되었던 것이지 모두 실제의 국사였던 것은 아니다.

오늘날 남아있는 자료에서 16명의 스님 중 몇 분의 스님은 사실 그 행적조차 알 수 없는 분도 있다. 이 중 보조국사 지눌은 교과서에도 나올 만큼(?) 유명한 분이라 언급할 필요가 없지만 이분의 제자 혜심慧諶은 우리나라를 대 표하는 선어록 편집자이니 바로 그 유명한 우리나라의 선어록집 ⟪선문염송⟫의 저자이다.

또한 그는 유학에 정통해 있기도 했다. 어머니에게 출가의 뜻을 밝혔지만 유학자 집안에서 불가에 출가하는 것을 만류하니 마음을 접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장례를 치르고 바로 보조국사의 제자로 출가하였다.

그는 당시에 만연 했던 불교내의 형식적인 주술이나 의례를 매우 비판하고 왕실과 스님들이 가까이 지내는 것도 못마땅하게 여겼다.

아마 누군가가 혜심에게 자신이 깨달음을 얻었다고 그 오도송을 보내왔었나 보다. 성철스님 같으면 아마 불호령이 떨어졌을 것이다. 깨닫지 않고 깨달았다고 이야기 하는 것을 ‘대망어’라고 하는데 보통사람이 절에서 받는 다섯 가지의 다짐에서 망어는 말로 타인을 상하게 하는 여러가지 형태지만, 출가자가 받는 5계에서는 그 항목은, 동일하기는 해도 그들의 망어란 사실상 대망어를 가리킨다.

그래서 성철스님은 “이런 놈은 하루에 만명씩 때려죽여도 돼”하면서 혼구멍을 내었다고 한다. 혜심스님에게 자신의 오도송을 보낸 이에 대해선 필자도 잘 모르겠고, 우리가 알 도리가 없으니 그가 깨달음을 얻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다.

분명한 것은 오도송을 보낸이에게 혜심은 우리같은 보통 사람이 봐도 알만 한 내용의 평이한 수준으로

“당신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 겁니다”

라고 따뜻하게 말해주는 것만 같은 글을 써서 보낸다.


돌아갔다는 말은 우리에게는 죽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왜 죽음을 돌아갔다고 했을까. 아마도 하늘로 돌아간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게다. 저 유명한 원효스님이 자신과 함께 이후 신라 십성新羅十聖중 한 사람인 사복이 찾아와서 어머니의 장례를 청하니 원효스님이 가서 한다는 법문이,

“너 올 때 난 갈줄 알았지”

라고 했다니 과연 어디서 왔길래 돌아간다고 표현한 것일까. 사실 이건 조금 편집된 이야기이고, 오해를 불식하기 위해 책에 나오는 이야기 그대로 소개하고 넘어가자면,

“나지 마세요, 죽으면 괴로우니, 죽지 마세요 다시 나면 괴로우니”
“莫生兮其死也苦, 莫死兮其生也苦”

이렇게 설법했다. 깨달은 양반이라 그런지 뭔가 카리스마의 냄새가 난다. 모든 걸 싹 요약해서 이렇게 법문했으니 사실 오늘날 절에서 돌아가신 양반에게 하는 법문은 참 길기도 하지만 저 말에서 벗어나는 게 별로 없다.

그러나 사복은 한술 더 떠서 말이 너무 많다고 원효스님에게 핀잔을 했다는것이다.그러니 원효스님은 또 그 말을 듣고 이렇게 고쳐서 설법한다.

“죽고 사는게 괴로움이라오”
“生死苦兮”


다시 돌아가서, 우리가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불교에서 돌아간다는 말은 자신에게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깨닫고 나면 우리는 다시 속세로 돌아간다.

“너는 이제 내게 배울게 없으니 하 산하거라”

란 유명한 말은 아마 여기서 나온게 아닐까?

(그래도 여전히 오늘날 서울 시내에서 특히 식당이 나 지하철, 백화점 등에서 스님이 두루막을 펄럭이면서 다니면 불교를 자주 접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대단히 어색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일단 몸이 속세로 내려가는 것은 여전히 매우 어려운 일이다.)

모든 문제들을 찾을 때 우리는 자신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에서 찾는다. 그러니 심지어 깨달음조차도 자신을 제외하고 찾는다. 번뇌도 깨달음도 그 출발은 자신에게서 시작되지만 밖에서 찾다보니 시간이 흘러갈 수록 점점 멀어질 뿐이다.

그래서 삼보에 귀의歸依한다거나 혹은 귀명歸依한다는 표현은 자신에게로 온전히 돌아갈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우리가 사는 방식은 당연히 밖을 향해 있다. 눈도 바깥을 보게 생겼지 안을 보게 생기지 않은 것처럼. 하지만 밖에 너무 정신이 팔리다 보니 자신을 잃어버리는 게 문제이다.

우리는 칭찬받고 인정받기를 바란다. 그것은 사실 욕심이라기 보다는 어떤 면에서는 이 세상의, 사회의 일부로서 그 온전한 몫을 해내는 것을 인정받을 때 가장 빛나기 때문이고 함께 사는 세상에서 나란 개체가 존재하는 의미를 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아이든, 어른이든, 심지어 치매에 걸린 노 인까지도 그 존재감을 인정받고 칭찬받으면 좋아하고 비난받으면 싫어한다 그게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자기 자신이다. 정작 자신이 스스로를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장 먼저 나를 인정해야 할. 사람은 누구보다 나 자신이다. 내가 나의 부족함에 대해 자책하고 핀잔하는 것은 더 잘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내가 나를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인정하지 못하는 나를 누가 인정할 수 있겠는가.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그래서 본인이 불행하면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도 함께 불행한 기운을 느끼고, 내가 행복하고 충만하면 나의 주변사람들도 괜히 마음이 편해지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당연지사.

내 이름을 듣는자는 지옥 아귀 동물세계에 들어가지 않게 되고,
내 얼굴을 보는이는 모든 고통과 구속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聞我名者免三途, 見我形者得解脫

나옹스님의 발원문으로 전해지는 이 내용. 이 정도면 사실 부처님도 한 수 물러서지 않을 수가 없다. 부처님은 같은 상황에서 뭐라고 하셨는지 보자.

모양이나 소리로 날 보려는 이는... 날 만날수가 없다네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 不能見如來

자, 필자가 보기엔 분명 나옹스님이 부처님보다 한 수 위인 듯 한데, 이게 부처님이랑 큰스님 이야기니 각자 알아서 판단에 맡기기로 하고, 나를 만나는 이가 이 정도의 베네핏을 얻으려면 얼마나 내공이 깊어야할까. 불교도의 발원이라면 되든 안되는 이정도의 스케일은 가져야 되지 않을까. 그런데 자신이 스스로 충만한 행복도 갖지못하고, 지금 스스로의 모습을 인정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어떻게 나를 만나는 이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겠는가.


결국 자신을 오롯이 만나면 스스로가 편해진다. 세상의 기준에서 봤을 때 좀 잘났으면, 혹 좀못났으면, 부족하면, 그대로 그걸 나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면 된다. 길지도 않은 인생 불편한 마음으로 살면 되겠는가.

물론 고뇌에 찬 철학적인 삶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그게 인생의 낙이라고 생각한다면 물론 그대로 살아도 좋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그것도 온전한 행복을 찾기 위한 것일텐데. 행복함을 찾는 사람이라면 먼저 붙잡고 있는 것들,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 신념, 기준, 자신의 과오, 지난 슬픔, 누군가에 대한 원망, 건강추구, 미래에 대한 두려움 등, 이 모두를 잠깐 내려놓고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보시라.

수 없이 많은 실수와 빈틈들이 우리가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는 척도이자 그 부족함 자체가 깨달음이라고. 결국 나를 묶어놓고 해탈하지 못하게,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도 자승자박慈乘自搏, 잘 보면 나 스스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시의 구절. 얼마나 멋있고 간단한가.

“번뇌가 없는데 무엇 때문에 깨달음을 말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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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_ 불식 1506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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