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LSIK / 명문감상 #005 "수행인가, 중생제도인가", 사명당 유정, 본법사의 섣달 그믐날 밤

명문감상 #005 "수행인가, 중생제도인가", 사명당 유정, 본법사의 섣달 그믐날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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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넓은 세상에 이 늙은이는

차림새와 생각이 서로 어긋나네
한해도 오늘밤이면 다 하는데
만리길 먼 땅 언제나 돌아갈까
옷은 적국의 비에 젖는데
오래된 절 사립문이 닫혔을까 걱정하네
향을 피우고 앉아서 잠못드는 밤에
새벽, 눈이 소리없이 내리는구나

사명당 유정惟政, 본법사의 섣달 그믐날 밤"


물론 고려시대에 이미 항마군降魔軍이란 몽고에 대항했던 승병이 있었으니 처음은 아니지만,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1597~)이란 두 번에 걸친 전쟁에서 한국불교는 전통에 반하는 큰 결심을 하게 된다. 신분이 출가자라 할 지라도 앞장서서 쳐들어 온 적을 막기 위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란 사회상으로 보면 매우 당연한 행보이지만 불교가 지켜온 기존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인도에서 불교가 이슬람에 의해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음에도 불교는 물리적으로 대응하지 않았고 오늘날 티벳불교교단의 망명정부 역시 중국의 무력에 땅을 내어주고 자발적으로 다른 나라에 임시정부를 세우고 줄곧 비폭력이란 원칙 아래 대응하고 있다는 것이 그런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조선중기 우리가 서산西山과 사명泗溟이란 이름으로 기억하는 휴정休靜스님과 유정惟政스님은 승군을 조직하여 일본에 대치함으로써 사실상 새로운 불교의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오늘날 호국불교란 명분을 내세우는 것은 사실 어떻게 보면 좀 특별한 조건에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호국불교란 이름을 한국불교의 큰 특징으로 보는 것은 어디까지나 교단의 사회적 단편으로 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즉 불교의 내용을 이야기하는데 있어서는 호국불교란 말이 한국불교를 대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평가야 어쨌든, 사명당 유정이 유명해진 것은 바로 승병으로 활동했었고 특히나 직접 일본으로 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담판을 하고 3천여 명의 포로를 귀국시키는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문집에는 제법 많은 시들이 실려 있지만 상당 부분 그의 시들을 보면, 주로 잠못 이루는 밤에 쓰여진 듯 하다. 그의 그런 시들을 보고 있노라면 선시禪詩라기 보다는, 마치 ⟪난중일기⟫에서나 만날법 한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시름이 떠오른다.

본법사란 절은 일본 교토에 있다고 하는데, 확인은 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도쿠가 와를 교토에서 만났다고 하니 어쩌면 그 무렵 거기에 있었던 것인가 추측해 본다.그를 만나기 전 아마도 그믐날 밤 새해를 앞두고 전후 협상문제와 또 적국에 나와있는 자신의 상황, 전쟁, 포로들. 그 마음속의 복잡한 심경이야 말할 수있었을까. 이 시는아마도 그런 그의 마음이 잘 드러난 글이 아닌가 싶다.

송운松雲은 그의 호이다. 우리는 그를 사명이란 이름으로 더 많이 알고 있지만 '유정'이나 '송운'이란 이름에 비해서 그 이름을 많이 썼던 것은 아니다.
그날은 비가 내렸나보다. 자신이 생각하는 스님으로서의 길을 전쟁이라는 시대상황 때문에 가지 못하고, 적이기에 살상할 수 밖에 없었던 많은 생명들. 그리고 당시 외국을 간다는 것, 더구나 적국 한 가운데 있으면서 "지금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지금 같이 평화로운 세상에나 할 수 있을 막연한 자기반성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당시 바닷길로 갔을 조선과 일본의 거리란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을 것인데 막중한 임무를 어깨에 지고 있던 그에게 고국 조선으로 돌아가는 것만큼 큰 바람은 없었을 것이다. 12월의 마지막 날 새해를 하루 앞두고 일본 사원에서 맞는 그믐밤, 그가 처량하게 맞는 비도 역시 적국의 비. 오래된 절古寺이란 조선에 있는 자신이 가야 할 어느 절 일수도 있고, 비를 피해 마지막 밤을 지새야 했던 일본의 본법사일 수도있을 것이다.

"비를 피해 적국의 사원에서 편히 몸을 뉘일 것인가, 차라리 적국의 비를 맞을 것인가."

밤새 잠못 이루는 새 비는 눈으로 변했고 새벽까지 사명당은 잠 못이루고 있었다.


‘하루바삐 귀국하여 자신이 원하는 스님의 길을 가는 소승의 길’,
‘협상을 잘 하여 더 많은 이들을 살려야 하는 대승의 길.’


전쟁에 참여했지만 그러나 한 사람의 출가자였고, 스님이기전에 그러나 보통의 한 인간이었던 유정의 고민은 그날 밤 어느쪽 이었을까.
유학의 철학이 중심이었던 조선에서 승병들의 활약은 사실상 역사에서 제대로 표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날 자랑하기도, 버리기도 애매한 ‘호국불교’란 이름이 말해주듯, 승병들의 역할은 지대했고 특히 사명당의 역할은 매우 큰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결국 원하던 당신의 길을 갔는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그의 스승 중 한 명이었던 서산대사 휴정 스님에 비해서 철학적이나 사상적으로 많은 양의 글을 남기고 있지는 않다. 때문인지 오늘날 우리에게 남은 그의 글들은 스님으로서보다는 용기있는 승병 장으로서 지고 견뎠어야 할 인간적인 감상들을 보여 준다.

도쿠가와를 만난 사명당, 두 사람의 만남 사이에도 한 편의 시가 전해지는데, 모든 명작名作이 그렇듯 유명한 글은 가탁되기 마련이다. 삿갓으로 유명한 김병연金炳淵(1807~1863)의 시에도 거의 같은 글이 전해 지고있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간 시가 맞는지 명확한 것은 아니지만, 그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는듯하여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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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光海君은 사명당의 시호를 자통홍제존자慈通弘 濟尊者라고 바쳤다. 홍제란 왜란의 침입에서 많은 백성을 구했다는 의미이다. 해인사海印寺에 홍제암이란 암자는 사명당에게 바쳐진 절이므로 이 호를 따서 지어졌으며 절 옆에는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許筠이 지은 ⟨자통홍제존자사명송운대사석장비四溟松雲大師石 藏碑⟩가 세워져 있다. 일제강점기 때 합천경찰서의 일본인 순사들이 부셔서 경찰서 입구 댓돌로 쓰는 바람에 오랫동안 시달리다가 지금은 다시 붙였둔 것인데 아직도 그 자국이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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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_불식 15/05(00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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