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LSIK / ⟪천수경⟫ 이야기 #4 "왼 손으로 지혜를 구하고 오른 손으로 중생을 구하고 1"

허물에 실체가 없다는 가르침이 ⟪천수경⟫의 백미임을 지난 3회에 소개했다. ⟪천수경⟫에서 참회란 결국 나의 허물 ,잘못에 대해 추궁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는 잘못을 한 이에게 벌을 주고 잘못이 없는 이들에게 복을 주는 가르침이 아닌데 왜 불자들은 끊임없이 참회하고 자신의 잘못을 수없이 성찰하고 또 후회하는 것으로부터 위안을 얻으려는 것일까.


우리는 깨끗하고 청정해야 한다는 강요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의 관념속에서 청정이란 상대적이다. 무슨말 인가 하면, 어느 선까지 청정하고 깨끗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청정하지 못한 내 주변이 있어야 내가 청정해진다는 것이다. 처염상정處染常淨, 더러운 물이 없는데 연꽃이 어떻게 청정한 꽃으로 칭송받을 수 있는가. 연못에서 연꽃 몇 송이가 깨끗함의 상징이 되기 위해서 큰 연못은 더럽다고 비난받아야 한다. 그래도 연꽃의 바탕이자 자존심을 위해서 더러운 연못을 비난하거나 무시하는데 우리는 아무도 가책을 갖지 않는다.


“더러우니까 더럽다고 해도 돼”


틀린 말은 아니지만, 가끔 우리가 그러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내가 남들보다 더, 혹은 남들과 달리, 좋은 사람, 정직한 사람, 올바른 사람, 더 똑똑한 사람이라고 무심히 우월감에 젖을 때가 있다. 그래서 본능적인 생존욕구로 인해 문제를 일으키는 것 보다 더 무서운 것이 사회적 욕망, 명예에 대한 욕망 같은 것이다. 내가 높은 명예를 얻는다는 것은 남들위에 올라선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출가자들이 재물이나 이성에 대한 욕망을 다 끊어내버려도, 누가 옆에 와서 큰스님, 큰스님, 훌륭하십니다. 대단하십니다.수행 참 잘하십니다 하면 그냥 무너져 내린다"

고 한 성철스님의 말씀처럼. 내가 청정함을 내세우고 특별 함을 내세울수록 결국은 타인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전제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뛰어나고 특출한 사람이 되는 것 보다는 좀 모자라고 부족함이 많 고 허물이 많을 수록 이해심의 영역이 넓어진다.


한달에 한 번 정도 교정교화법회 - 교도소 재소자 법회 - 에 2년여간 정도 참석해 본 적이 있다. 부산교도소나 대전교도소, 그리고 청송의 보호감호소 등지에서 항상 느꼈던 그 군중의 표정과 몇몇 눈빛들은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또렷한데, 그 무게감이란 사실 말로 형용하기는 어렵다. 같은옷을 입고 한 곳의 장소에서 같은 신분인 것은 참 비슷한데, 스님들이 모여있는 큰절에 모여서 있어 보면 여러 크고 작은 군상들이긴 해도 전부 다 잘난사람들이다. 기본적으로 출가자들은 스스로가 가장 많은 것을 알고 있고, 위대한 길을 선택했다는 자부심으로 그득 차 있다.


그런데 수인들은 다르다. 개중에는 억울함으로, 개중에는 참회하는 얼굴로 보이는데 - 그것도 보는 이들의 선입관일지도 모르지만 - 나는 잘난 사람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이 지식을 쌓는 무게와 글을 쓰는 필력,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나 행동에서 풍겨나오는 무게는 마치 오랜 수행을 한 사람들인 것만 같았다.

스님들의 대중처소에 가면 군대에서 후임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나 종가집의 어른들이 시집온 며느리에게 하는 것과 같은 분위기의 섬세한 말이나 행동, 생활의 절도가 요구된다. 그걸 몇년씩 하다보면 그 예리한 각이 말할 수 없이 날카로워지고 절도가 생기며 예민해진다. 그러다 보니 남들이 발견하지 못하는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에 대해서 충고도 조언도 잘한다. 그리고 그 서릿발 같이 차갑고 송곳처럼 뾰족한 끝으로 타인들을 푹푹 찌르고 다닌다. 마치 자신이 법을 수호하는 보안관이라도 된 듯, 자신이 청정하고 옳다는 교만으로 똘똘 뭉친 괴물인줄을 모르고.


그래서 청정, 순수, 정의는 당연히 다수의 이익을 위해 지켜져야 하지만 그게 고착화 되고 고질화가 되면 반대로 그 이름들은 폭력이 되고 만다. 그래서 청정, 순수, 정의도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 상대적인 가치다.

이제 선악이란 관념은 완전히 내려놓고 지지계가 아니라 작지계를 실천할 때가 되었다. 이른바 10가지 발원, 십원이 등장한다.

南無大悲觀世音
대비관세음께 귀의합니다.

願我速知一切法 願我早得智慧眼
저는 빨리 지혜로운 눈을 얻어어서 모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

願我速度一切衆 願我早得善方便
저는 빨리 많은 기술을 얻어 어서 모든 중생을 구하기를 원합니다.

願我速乘般若船 願我早得越苦海
저는 어서 지혜라는 배를 타고 빨리 바다와 같은 고통에서 건너가기를 원합니 다.

願我速得戒定道 願我早登涅槃山
저는 어서 계정혜 삼학으로 빨리 열반이란 산에 오르기를 원합니다.

願我速會無爲舍 願我早同法性身
저는 어서 무위란 집에서 만나 빨리 법성이란 몸과 하나가 되기를 원합니다.


십원은 두 개씩 짝을 지어서 7언절구 형식, 앞 구에는 속速을 뒷 구는 조早를 써서 같은 의미의 다른 글자를 교차로 운율을 맞췄다. 여기서는 속은 어서, 조는 빨리로 구분해서 번역했다.


지혜의 눈을 얻어서 모든 법을 보나, 모든 법을 알아서 지혜의 눈을 뜨게 되나 순서가 어느쪽이든 조삼모사朝三暮四다. 방편이란 방법이란 뜻으로 흔히 진리가 따로 있고, 방편은 버려야 할 인스턴트로 생각하지만 방편이야말로 본질일 수도 있다. 결국 방편方便이란 다양한 세상, 사事의 세계이다. 온갖 기술들이니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못하던 요리를 만들 수는 없고, 컴퓨터를 자유롭게 다룰 수도 영어를 잘할 수도 없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세상에서 그걸 구현하려면 기술이 뛰어나야 하니 방 편은 부처건, 중생이건 전부 다 따로 배워야 한다.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50명이 넘는 스승들을 따로 찾아 다니는 것은 결국 다양한 세상일 에 대해 배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생과 함께 호흡하려면 중생의 기술을 중생보다 잘 알아야 한다. 그러니, 세상일에 관심이 없으면 중생도 구할수가 없다. 그런 사람은 신선神仙이 될 수는 있겠지만 보살bodhisattva이 될 수 는 없다.


반야라는 배나 고통이란 바다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괴로움과 불만족이 차고 넘치니 바다에 비유하고, 지혜는 그 바다를 건너는 배에 비유한 것이다.

계정혜는 계율과 선정, 지혜의 세 가지로 깨달음을 얻는 기본적 요소이다. 그래서 원적산 - 우리가 쓴 판본에는 열반이라고 나온다. 열반은 니르바나nirvana를 소리나는대로 중국말로 음사한 것이고, 우리가 대개 ⟪천수경⟫을 읽을 때 읽는 원적圓寂은 뜨겁게 타던 불이 꺼진 상태를 번역한 말이다. 원은 기본적으로는 둥글다는 뜻이지만 비유적으로는 완전하다는 의미다. “완전히 고요해졌다” 멋지지 않은가. 문제는 산山인데, 산은 열반을 올라야 할 경지로 봐서 산에 비유했다, 그런데 앞 구절은 비유가 없다. 그래서 아마도 계정혜의 혜慧를 산으로 올라가는 길, 도道/途로 쓴 것일 것이다. 혜를 대신하기도 하면서 길을 의미하는 중의적 표현이다. 그래서 전에 어떤 스님들은 정定을 족足으로 바꿔서 '계정도'를 '계족도'로 읽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결국 십원十願은 요약하자면 사홍서원에 다름 아니다.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그리고 마지막, 무위사와 법성신은 진리 그 자체가 되겠다는 말이다. 그게 무슨 말일까. 불교는 주객이 하나가 된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니까 어떤 한 중생이 깨달아서 부처가 되는게 아니라, 그냥 그 중생과 부처의 경계를 허물어
버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개 오해를 많이 한다. 다시 한 번. 불교는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 아니라 중생과 부처란 경계를 잊어버리는 방식이다. 수없이 그렇게 경전들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데도 이말이 어색한건, 우리가 부처님은 엄청 좋아하면서도 그분의 말씀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탓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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