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LSIK / ⟪천수경⟫ 이야기 #1 "천수천안무애대비심..."

아마도 항상 읽기 때문에 익숙하겠지만 사실 ⟪천수경⟫이란 책의 이름은 아마도 동남아나 인도의 불자들에게 물어보면 전혀 모를 것이다. 그러나 천수경이 우리나라에서 유독 익숙한데는 복잡한 이유가 이래저래 얽혀있다. 먼저 천수란 말에서 이미 감이 오지만 이 책은 철저하게도 우리에게 익숙한 또 하나의 이름, 관세음보살과 연결되어 있다.

천수천안 관자재보살 광대원만 무애대비심 대 다라니경 千手千眼 觀自在菩薩 廣大圓滿 無碍大悲心 大 陀羅尼”

이게 ⟪천수경⟫의 원래의 이름이다. 길기는 한데 이게 다 주렁주렁 수식어다. 관자재보살은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손(혹은 팔)을 가졌다는 수식이고 대비심의 대비란 “비”로 대大자 붙이고, 무애無碍 붙이고, 원만圓滿 붙이고, 광대廣大 붙이고...


그러니까 '무지하게 크고', '무한'하고, '완전'하고, '넓고 큰' 그런 '비심悲心'이라는 이야기다. 예전 사람들은 그렇게 긴 이름을 선호했다. 그들에게 이름과 수식과 형식은 길고 장황할 수록 좋은 것이었다. 예전엔 그랬다.

지금은 단순, 심플이 더 중요한 덕목이니 긴 이름이 거추장스럽게 여겨진다. ⟪천수경⟫이란 간단한 이름이 훨씬 간결하고 좋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일이다. 앞으로 ‘한 오백년’ 후의 뒷사람들은 2000년대를 살아갔던 우리에게 삭막하고 건조한 스타일이었다고 핀잔을 줄지도 모를 일이다. 여튼, “관자재보살 다라니”가 팩트고, 나머지는 그냥 수식이다. 이래저래 너무 길어서 맨 앞 ‘천수’에 ‘경’붙이면 그게 그냥 ⟪천수경⟫이다.


오늘날 우리가 즐겨듣는 음악은 그 출발이 종교의례로부터 시작되었다. 종교가 싫건 좋건, 어떤 종교를 선택하든, 사실은 그렇다. 그걸 찬가 纘歌/chanting라고 하는데 어느쪽이 먼저 인지는 모르겠으나 중국말 찬讚이나, 혹은 창唱, 영어 찬트chant이나, 프랑스말 샹chant이나 다 같은 말이다.

물론 우리도 한자말을 따라서 '찬'이라고 한다. 선점했던 ‘찬송讚頌’은 이웃종교에 빼앗기는 바람에 안쓰고 '찬불讚佛'로 대체하고 있지만 전에는 찬송도 불교에서 썼다. '찬송'에서 '송'은 가사로, 오늘날 노래를 의미한다. 이도 'song'이 먼저인지 '頌'이 먼저인지 모른다.


그래서 찬송가란 말은 동어반복이니 실은 좀 어색하지만, 찬불가는 맞게 쓰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내용은 당연히 부처님에 대한 찬탄이다. 그러니까 찬가란 성인에 대한 온갖 미사여구로 장식된 그 분의 능력에 대한 수없는 반복이다. 따라서 실은 한 100중 99를 덜어내 갖다 버려도 내용상 문제될 것이 없다.

글쎄, 21세기를 사는 우리 스타일대로라면그 1도 좀 많다.


천수경 안에 있는 내용들은 사실 밀교적 요소들로 가득하다. ‘나무 namas’로 시작하는 인사와 같은 말도 있지만, ’ 옴oṃ’으로 시작하고 훔hum이나 사바하svaha로 끝나는 대부분의 내용들, 그리고 무슨 소린지 해독이 불가능한 이른바 ‘신묘장구대다라니’는 통째로 밀교의 주문들이다.그 밀이란 당연히 반야바라밀의 '밀'은 아니다. 말 그대로 '비밀'의 뜻으로 그들의 표현대로라면 대승불교의 꽃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대승불교의 꽃은 중국에 와서 핀 선종이지만 뭐, 물론 꽃이 한송이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냥 꽃인걸로 - 부처님이 뭔가 결정적인 비밀은 제자들에게 말해주지 않았고 그걸 연구하고 알아내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이들이다.


이 밀교야말로 '철학'이자, '윤리'이며, '사상'이었던 불교를 ‘종교’의 위치로 끌어 올렸고 스승이자, 선생이며, 세상의 가장 앞에 서 있던 붓다를 '신'이자 '절대자'의 자리로 끌어내렸다.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불교가 훨씬 사람들의 가슴에 더 넓게 퍼질수 있게 되었고, 사람들에게 필요한 어떤것을 줄 수 있으니까 불교가 종교가 된 것은 ‘업그레이드’ 된것이 아니냐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생각해보면 내 바로 옆에서 원할 때 언제든 만날 수 있는 붓다를 ‘절대’의 세계로 보내버려서 평생을 한 번 만나보지도 못하고 상상속 존재로 만들었으니 인간 붓다가 신처럼 되어버린 것은 결코 잃은 것 보다 얻은게 더 많다고 할 수 없겠는데. 신은 동서양에 널려 있지 않은가. 절대신도 유일신도 있고, 그리스-로마 신화의 수많은 신 들, 인도의 3억의 신들, 심지어 절에는 신들이 너무 많아서 불화하나에 몰아서 그려놓기도 했다. 그게 마치 살아있는 존재들 ‘중생’처럼 ‘신이라는 존재들, 신중神衆’이다.


수식어 이야기가 나온 김에, 부처님을 ‘인천의 스승’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천이 신이다. 그러니까, 중생, 살아있는 것들 사이에서 캐릭터 확실하게 드러내고 사람과 신들의 스승이 된 분을 다시 신으로 끌어내린거다. 격상이여, 격하여? “아, 뭣이 중헌디.”

여튼 고려시대에 티벳과 몽고를 통해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 밀교는 그들이 가진 종교적인 요소 때문에 불교 교단에서 의미있는 역할을 하게 되었지만, 동시에 불교를 종교화 시킴으로 '세속화' 시켰다. ‘성’, ‘속’의 구분에서 종교와 속세는 반대개념이지만, 불교가 지나치게 종교화 된다는 것은 '세속화'라고 봐야한다. ‘성’이란, 종교의 일반적 가치로 보면 마치 더러운 세속을 떠난 깨끗한 초월의 어떤 세계인 것 같지만 결국 그 뛰어난 세계에 다가가려는 것은 그걸 통해서 이 세상은 더러운 것이며, 그곳에서 나만, 혹은 나부터 벗어나서 남들보다는 좀 깨끗한 사람으로,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좀 더 많은 복과 재물을 구하려는 생각과 욕심이 전제 될 수밖에 없으니 불교가 바라보는"‘성'스러운 종교화"란 것은 역으로 ‘세속화’일 수 밖에 없다.


연꽃이 사랑받는 것이 산속 1급수에 홀로 우아하게 피기 때문이 아니라 동네 더러운 뻘물속에서 피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빛은 어두운 곳일 수록 돋보이는 법이다. 그런 부처님을 신으로 만들어 버리면 되겠는가 말이다. 오메 답답혀...

⟪천수경⟫이 우리에게 읽힌 역사는 약 100년 정도로 사실 생각보다는 매우 짧다. 대장경에 우리의 천수경이 통째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유사한 이름의 책들은 많이 있지만 분량이나 내용은 차이가 좀 나는데 어쨌든 누군가에 의해서 오늘날의 천수경으로 만들어 졌지만, 이를테면 ‘참제업장 십이존불’같은 것은 아주 최근에 삽입된 내용이다. 그래서 조금만 예전 의례로 돌아가면 몇몇 내용은 읽지 않았던것을알 수 있다. 내용이 짧아지면 실리적인 것이고, 내용이 길어 지면 종교적 성향이 더해지는 경향이 있다. 예전의 가치와 지금의 가치는 많이 다르기 때문에 이런 논의가 가능했지만, 예전에는 책에 있는대로, 혹은 더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하나라도 빠뜨리는 것을 대단히 경계 했다. 사실 지금은 생략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


역사적 부처님도 당시 그 의미를 잘 모르고 행하는 종교의례에 대해서, 전통이라고 무조건 따라하는 것은 의미 없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리고 정히 할거면 현실적으로 가치있는 의미를 부여해서 하라는 장면들을 책에서 만날 수 있다.

오늘날 한국불교는 여러가지 요소가 들어간 ‘통불교’를 자처하지만 중심종단이자 사실상 유일종단인 조계종은 그 중심이 ‘선종’이기 때문에 많은 의례를 생략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는 많이 정리된 의례를 행하고 있지만, 의례를 중시하는 이들에 의해 많은 요소들이 다시 덧붙여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은 의례를 상당부분 간소화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다.


다만 천수경과 같이 일상의례집의 목표중 하나는 외우는 부분에 있는데 불교교리나 역사적인 부분들을 매일 읽으면서 암기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천수경을 암기하게 되면 교리를 암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익숙하게 되면 공부에 도움이되는것은 사실이다. 주로

숫자로 된 내용들이 그런 것인데, 예를 들자면, 신구의 3업, 탐진치 3악, 계정혜 3학, 불법승 3보, 등이 되겠다.


그러나 천수경이 갖고 있는 중심의 내용은 역시 관세음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이 그 많은 보살들을 제치고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보살로 떠오른데는 바로 이 천수경과 같은 경전을 통해서 가능했다. 천수경의 내용이란 관세음보살 자신이 참회, 발원, 귀명을 통해 보살의 나아갈 역동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동안 공부했던 금강경이 보살의 마음 가짐에 대한 이야기라면 천수경은 구체적으로 보살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하는 일종의 액티비티를 나열한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우리가 천수경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마음의 평온을 얻거나 어떤 신비한 기운에 쌓이는 감정을 느끼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천수경이 무슨이야기를 하고있는지 그 철학에 집중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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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_ 불식 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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