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LSIK / ⟪법성게⟫ 이야기 #1 "법성원융무이상"

다르마의 성질은 완전히 섞여버려서
두 개의 형태로 나눠지지 않습니다
法性圓無二相

여기 주관이라 불리는 무엇인가가 하나 있다. 수동태로 말하자면 그 주관에 의해서 보여지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이 주관과 객관을 심층분석한 내용, 아주 미시적인 세계로 들어 가기도, 거시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기도 하며 그 둘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하는, 문과文科에 더 가까운 불교에서늘 사실 잘 없는 이과理科계통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理)와 사(事)

저 '이'란 말이 세상의 물리적 현상을 분석하는 것이라면 그 현상을 법성게에서는 '사事)'라 부른다. 우리는 대개 사, 현상이란 좀 세속적인 것이고 그것을 분석해서 얻는 것 혹은 그 행위, '이'란 좀 더 본질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이와 사가 절대로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매우 단호하게 반론하는 것이 이 책의 핵심 내용이다.


사물의 본질에 대한 호기심이 아주 많은 사람이라면 이 ⟪법성게⟫는 매우 매력적인 책이다. 대승불교에서 물리를 이만큼 잘 다루는 책도 또 없을 것이다. 물론 화엄경이란 우주론에 바탕한 엔솔로지이기는 하지만. 단 210 글자의 아주 짦은 라임에, 1400년 전 전, 7세기를 살았던 의상이란 한 스님이 당나라 유학생 신분으로 스승을 감동하게 만든 그런 글이기도 하다. 아, 당나라. 어딜 가더라도 지금으로 치면 하바드 유학쯤 되시겠다. 의상보다 한참 뒤에 떠났던 최치원은 특별하게 한 것도 없지만 그 간판 하나 달고 평생을 큰소리치며 살기도 했으니.


어떤 사물이건 부분과 전체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전체를 쪼개나가면 부분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작업을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까지 해서 만나는 물질, 그것이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것" '아톰atom, 원자'이다. 과학에서 이 가장 작은 물질은 화학적인 분해와, 그것을 관찰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이 개념을 불교에서 처음 쓰기 시작했던 2천년 전에는 '분해'도 '관찰'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만 이것은 이론적으로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스님들은 - 당시 인도의 스님들은 상당수가 논사라고 불리는 전문학자였다 - 지금으로 말하면 과학적이기도 철학적이기도 한 지식들, 예를 들어

자아란 몸 어디에 있는가
소리란 원래 있다가 나온 것인가 새로 만들어진 것인가
사물은 색깔과 형태로 나누어질 수 있는가 없는가
시간 은 얼마나 짧게 쪼갤 수 있는가

와 같은 구체적인 지식에 대해 연구하고 토론했다. 불교의 스님들이란 마치 그리스의 철학자들 처럼 세상에 대해 가장 많은 지식을 가진 지성인들이었다. 때문에 이런 분석철학에 대한 연구가 가능했다 물론 17세기 이후 서양의 학자들이 관심을 갖기 전에는 이런 지식의 보고는 천년동안 묻혀 있었다. "소승 - 수준낮음"이란 불명예를 달고.


우리가 천 년 만에 그 보고의 문을 열기 전에 그것이 묻히기 전 마지막 활동가 중 한 사람이 바로 의상이다' 그조차 원효란 카리스마 넘치는 스님에게 가려 모르는 사람도 많긴 하지만.


그가 이 글의 첫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법' 산스끄리뜨로 다르마dharma는 사물의 가장 작은 단위, 원자를 의미하는 불교용어이다. 의상은 다르마, 법이란 첫글자를 제시하고 그 성질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간다.


원융/이상

원융에서 원은 둥글다는 뜻이지만 '완전하다'는 의미도 되니까, 융합한다는 말과 함께 "완전히 융합"한다는 의미이다' 그럼 두 개의 상은 무엇일까. 법성게는 화엄경이란 책의 엔솔로지니까, ⟪화엄경⟫ 이야기를 해야 한다. ⟪화엄경⟫은 모든 사물의 여섯 가지 상반된 진실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뜻이다.

모든 것은 부분(別)이자 전체(總)이다.
같기도(同) 하고 **다르기도(異) 하다
생성(生)파괴됨(壞)은 동시다

부분과 전체의 동시

이것들이 '동시'에 같은 사물/현상에 일어나는 현상으로 볼 수 있을까. 집에서 지붕과 기둥은 각각 이기도 하다. 그 둘은 따로 떼어 놓으면 그냥 '목재'지만 지붕을 올리는 기둥으로 받쳐두면 기둥이 되고, 지붕이 되며 그걸 이라고 부른다. 해체하면 기둥도, 지붕도, 집도 사라진다' 전체가 없으면 부분도 없다' 부분(기둥, 지붕)과 전체(집)는 '부분'인 동시에 '전체'이다. 천년 전엔 이것이 난제였겠지만 DNA가 이미 발견되었으니 머리카락 하나, 손톱 하나에서 몸 전체를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되고, 그것들이 다시 몸 전체에 펴저 있다는 걸 생각하면 우리에겐 크게 놀라운 이야기는 아니다.


같음과 다름, 생성과 소멸의 동시

같음과 다름은 주로 동전의 앞뒷면이나 물과 파도, 물과 얼음 등의 비유로 설명된다. 그 두 가지가 '같음'과 '다름'으로 양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생성'과 '소멸'도 그렇다. 어린아이와 노인은 성장하는 동시에 소멸로 가는 과정이다. 하루하루 모든 세포들과 혈액은 새로 생성되고 파괴된다. 어디까지가 성장이고, 어디부터 소멸이라고 딱 자를 수도 없겠지만, 실제로 아이가 성장한다는 것은 소멸에 가까워짐을, 노인이 늙어 간다는 것은 여러면에서의 성장을 의미한다.


이를 6상(여섯 가지 존재의 형태)라고 하는데, 두 개씩 상반되기 때문에 2상(두 가지 형태)이라고 줄였다. 이 형태가 모든 물질이나 현상에서 동시에 일어난다' 즉 사람이건 물질이건 그 부분과 전체, 같음과 다름, 생성과 파괴란 형태를 동시에 모두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극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것, 그것이 모두 동일한 시공에서 일어난다. 바로 '다르마'가 그렇다는 것이다. 이 한 구절에서 ⟪법성게⟫절반의 내용이 모두 나타났다. 나머지 구절은 이 구절에 대한 반복과 부연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n4o2cextfpaostdgw6su.png

H2
H3
H4
3 columns
2 columns
1 column
Join the conversation now
Logo
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