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LSIK / ⟪법성게⟫ 이야기 #4 "진성심심극미묘"

다르마의 성질은 대단히 깊고 매우 미세하며 희안합니다.

眞性甚深極微妙

⟪법성게⟫는 운율을 맞춘 시적 언어이므로 그 운율을 맞춰야 하는데, 리듬을 맞추면서 오늘날의 우리말로 해석하는 것은 필자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므로 리듬을 과감히 포기 하기로 한다.

'심심하다'란 표현은 비지니스 상황에서 쓰이는 ‘심심한 감사’, ‘심심한 조의’등으로 쓰이는 '대단히', '엄청'이란표현이다. 미묘미세함희안함이란 두 글자를 붙여서 아주 유니크함을 의미하기도 하고 붙여서 하나의 술어로 '희안하다'란 의미로 써도 상관없다. 두 용어 모두 이제 우리가 잘 사용하지 않는 옛날 용어이지만, 그냥 '엄청나다'란 뜻이라고 보면 되시겠다. 옛날에야 특별히 엄청난 일을 살아있는 동안 목격할 일이 없어서인지 이렇게도 강조를 했지만, 오늘날 우리야 그 엄청난 일들을 밥먹듯 목격하고 사니, 그냥 ‘대박!’이라고 한마디로 해도 되겠다. 그러니까 예전 사람들과 우리가 느끼는 강도가 같지 않다는 말이다.


그런데 요새 ‘극’이란 말은 ‘극혐’이란 표현과 함께 많이 쓰는 말이니 익숙할 것이다. ‘극혐’이라니, 얼마나 싫으면 극혐이 될까. 참고로 ‘극락’도 즐거움이 ‘극’이라니 얼마나 즐거운 동네인지는 모르겠다. 서양 사람들은 중국, 한국, 일본을 극동 Extream Orient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아, 동쪽의 끝이라니. 누구맘대로. 그래도 영어권에서 부르 원동(遠東, Far-east)은 좀 나은가 싶기도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중동 다음은 다 여기에 묶어서 불렀으니 사실은 인도의 동쪽은 다 극동일 수도 있겠다. 아, 대체 누구맘대로.


그건 그렇다 치고. 얼마나 미세하고 희안하길래 미묘일까. 여기서는 역시 오늘날 우리가 잘 쓰지 않는 ‘묘(妙)’를 '희안하다'고 번역하겠다. 그러니까 '묘'란 대개 쉽게 볼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닌 특별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잘 없으니까 그걸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을 지칭한다. ⟪법성게⟫란 수없이 강조했듯, ⟪화엄경⟫이란 책에 근거한, 철학을 주제로 하는 내용이지만, 형이하학을 따로 구분하지 않는다. - '철학'은 현상넘어의 뒷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형이상학이라고도 하지 않는가. - 다시말해, 이 두 용어는 요샛말로 하면 '철학’과 '과학’을 폼나게 쓴 말이다.


형이상학 = 사물의 배후에 있는 학문 = 철학
형이하학 = 사물에 관한 학문 = 과학 (걍 현실적인 모든 것들)

이 두 가지는 그동안 철저하게 구분되어 왔다. 과거에 과학에 기반한 현상이나 직업들은 천박하게 여겨졌다. 사농공상. 모든 몸을 쓰는 것들이란 그랬다. 오늘날도 대개 노동자들이 자본가보다 사실 훨씬 많은 노력을 하지만 훨씬 못한 대접을 받는다. 지금도 많은 이들은 신비주의를 고수한다. 하지만 인간의 일이란 우리나 당신들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안다. 그러니까 ‘공공연한 비밀’, 알면서도 눈감아 주는 정도이지 같은 시공간에 살면서 누구는 알아도 되고, 누구는 몰라야 된다는 생각 자체가 스스로에 대해서는 기만이고, 상대에겐 폭력이겠다. 이른바 '보안이니 안보니 어쩌고'가, 도대체 누구를 위한 비밀이고, 브라만의 베다를 몰래 듣는이의 귀를 자르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러니 타고난 계급이 아니면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는 자체가 막혀 있으니 더 이상 올라갈 수가 없었다. 그래도 노력하면 엘리트가 될 수 있는 길이 조금은 열려 있는 지금은 좀 나은셈이다. 하지만 여전히 기술이든 뭐든 자본가가 최상위층 아닌가. 그들에게 철학이란 스스로가 상류층에 살고 있음을 지식의 과시용으로 쓰이는 그 이상이 아니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지식과 정보는 모두 과학적인 것을 기준으로 한다. 그 과학적인 것이 '형이하학'이니까, 철학이나 과학이나 우리가 살기 위해 모두 필요한 도구인데도 그걸 둘로 쪼개놓고 어떤 것이더 우위에 있고 더 본질적이라고 여기고 우기는 것 자체가 대단히 이상한 현상 아닌가. 이건 김밥의 요소 중 김이 더 중요한지 밥이 더 중요한지를 놓고 다투는 어리석은 분류법이다. 애초에.


⟪법성게⟫는 진리와 깨달음의 이상적인 세계를 이야기 하면서 그 소재를 철저하게 물리적인 관점을 도입했다. 법성에서 법, 즉 다르마라고 불리는 대상이 오늘날 아톰(atom), 즉 원자라는 개념이었다는 걸 인지했다면 아마도 법성게가 쓰여지던 7세기의 사람들 중 대다수는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라고 비판했을지도 모른다. 철학자들에게 사물은 껍데기였을 뿐이었다. 그 껍데기로 진성을 논하겠다고? 그러나 법성게는 그 껍데기에 본질적 요소가 있고, 본질이라고 믿는 것들도 껍데기를 구성하는 것과 같은 요소로 구성되어있다고 선언한다. 법성게에 있어서 껍데기는 껍데기고, 알맹이는 알맹이일 뿐, 어느쪽이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가란 의문자체가 무의미 했다. 팥빵이라고 해서 앙금이 정말 더 중요한가? 앙금이 없어도 팥빵이 아니지만, 빵이 없어도 팥빵이 아니었다.


다르마에 관한 이야기는 앞선 강의에서 이미 충분히 강조했으므로 오늘 나온 진성이란 개념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불교는 왠만해선 새로운 개념들을 만들지 않았다. 붓다란 분은 재활용의 대가였기 때문에 그가 설법을 통해 남겨둔 철학적인 개념들은 사실 그 이전부터 거의 있었던 것들이다. 그러나 독창적인 불교만의 개념이 있다면 불교철학에서 가장 중시하는 무아란 개념이 되겠다.


아직도 이 무아란 개념은 완벽하게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그것이 바로 관념 시작과 현상의 작용을 하나로 묶어서 봐야하는, 우리가 기존에 잘 하지 않던 방식으로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언어로 완전히 자아를 부정하고 나면 그 다음에 무엇인가 이야기를 진전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옛날에 빗자루 귀신이 한 명 있었어…”

그러고 나서 우리는 빗자루 귀신에 대한 전설과 그의 생김새, 그리고 그가 언제 나타나며, 성질은 어떻고를 주욱 이야기 해야 한다. 그런데 "과학적으로 귀신의 존재자체란 말이 안돼”라고 부정해 버리고 나면, 빗자루귀신 이야기는 할 수도 없거니와 한다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하지만 이건 이야기니까 그냥 재미로 해도되고 들어도 된다. 그런데 그것이 귀신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이야기라면 어떨까. 이야기도 아니고, 지금 내 의지대로 살아움직이는 나의 진짜 정체. 그 배후의 있는 우리의 영혼, 혹은 보이지 않는 진짜 나, 이런 것들은 과학적으로 증명이 될까? 아니면 우리조차도 그냥 이야기일까? 다시 말해서 그냥 이야기 - 허구 - 와 진짜라는 것이 다른 것이기는 할까?


많은 이들은 무아와 살아있는 우리 존재를 동시에 설명하기 위해

"부처님은 무아 - 자아란 없다 - 라고 말했지만, ‘진아 -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지만 진짜 자아 - 란 있을것"

이라고 설명하면서 안도하기도 한다. 이른바 일본에서 불교를 연구하는 이들의 "무아설에 대한 진아론眞我論)"이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그것은 무아설을 완전히 거꾸로 해석한 것이다. 붓다가 없다고 한 ‘아’란 바로 이 진짜 아이기 때문이다. 엉뚱하게도 붓다는 오히려 현상적이고 경험적인 자아에 대해서는 인정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말한 ‘무아’란 매우 철학적인 개념이다. 자, 이제 바꿔보자. 법성게가 말하고 있는 여기서 말한 '진성眞性'이란 ‘진짜법성’이 아니라 그냥 법성을 진성이라고 이름만 바꿔 쓴 것이다. 그러니해석할 때는 '진짜법성이 아니고 그냥 '법성'이라고 해석하면 된다.


‘법성이 원융하고 둘이 아니란 것’은 분석하고 분별을 통해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는 우리의 습관상, 다르마의 성질을 이해하기에는 그 다르마의 성질이 너무 희안하고 깊은 의미란 뜻이다. 그러니까,

‘진성심심극미묘’

란 구절은

"얘들아, 니들이 이해하기는 되게 어렵지? 정신줄 잘 붙들고 내말 들어봐."

아, 제대로 낚였다. 이 구절을 갖고 이렇게 씨름했다니! 하지만 이 다음 구들에서 ⟪법성게⟫가 말하는 육상원융 철학의 정수가 펼쳐진다. 그래서 우리는 실망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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