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버지니아 울프에 공감하는가

A short summary in English is to be found at the end of thi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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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이 담고 있는 메시지가 유독 왜곡되는 경우가 있다. 특히 각종 매체에서 자주 언급되는 책은 조악한 요약을 통해 소개가 되고, 굳이 읽어볼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의 단편적인 기억에 의해 계속 그 형태로 굳어져가게 마련이다.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케임브릿지 대학 강연에 살을 덧붙인 에세이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을 보자. 가히 스포일러라 할 만한 제목이다. 울프의 이름을 들어보고 그녀에 대한 대략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 책이 여성이 공간적, 경제적 독립을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으리라고 예상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 초기 페미니스트의 주장 정도로 해석될만한 이런 메시지는 오늘날에 와서는 특별히 급진적이지도, 특이하지도 않다. 굳이 자세히 읽어볼 필요를 못 느낀다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자기만의 방은 그런 글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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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흘러간 시대의 의식 수준을 낮춰보는 경향이 있다. 울프의 케임브리지 대학 강연은 1928년, 그 내용을 묶어서 자기만의 방을 출간한 것은 이듬해인 1929년이다. 여성이 투표할 수 있게 된지 약 10년 가까이 흐른 때이다. 당대 최고의 지성이 그저 여성의 경제적 독립을 권장하기 위해, 당시 여성으로서 최고의 교육을 받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해야 했을까.

이 의문에서 출발하면 자기만의 방에 대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조명된다. 자기만의 방은 여성 일반이 아니라, 여성 중에서 미래의 지성인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인물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대중이 소비할 수 있는 작은 한권의 책 형태로 출간되었다 하더라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울프 본인이 상속으로 인해 연 500파운드의 수입이 생긴 경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암시하는 것은 방해 받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이지, 하루 하루 노동과 맞바꾼 돈으로 지탱하는 힘겨운 경제적 독립이 아니다. 울프는 현실주의자이다. "자기만의 방"을 가진 여성이 되려면 아버지든, 오빠든, 남편이든, 이모든 간에 경제적 여유를 마련해주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울프를 페미니스트로 보기 힘든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녀가 여성으로서 글을 썼고 여성에 대해 "여성적인" 글을 썼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현대적인 의미에서 페미니스트/여성주의 작가라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울프는 여성 일반의 설움을 씻으려는 전사가 아니라, 특별한 여성이 그 재능을 전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한 사람의 선배 작가였다. 그녀는 남편과 한 집에서 남남처럼 살 것, 남편이 작가로서의 자신을 항상 인정해주고 지원해달라는 조건을 내걸고 결혼에 응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은 그녀의 복잡한 정신질환을 보다 잘 돌보기 위해 출판업을 시작했다.

다시 말해서, 울프는 당대 기준으로 남자의 도움 없이 독립적인 공간을 가질 수 있다거나 성공할 수 있다는 꿈을 꾼 적이 없다. 물론 자신이 여성이라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남성 문호들의 절대 다수도 고등 교육을 받을 정도의 여유 또는 후원이 뒤따랐으며, 그 누구든 간에 편안하게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이 뒷받침을 해주어야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울프의 주장이었다. 제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작가라도, 석탄을 캐거나 환자를 간호하면서 위대한 작품을 탄생시키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울프가 결혼 전 남편에게 다소 과한 요구를 한 것은 아마도 자신이 원하는 조건이 완벽하게 충족되어야만 작가로서 살아갈 수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국 결혼 후에는 자녀를 가지려는 노력도 했다지만, 울프의 동성 연인과의 관계는 익히 알려져 있는 주제이다.

자기만의 방에서 울프의 염원은 천재적인 여성 작가, 말 그대로 문호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을 여성 작가가 등장하는 것이었다. 울프 본인이 남편의 희생을 요구한 것도 어쩌면 자신이 그런 작가가 될 가능성에 모든 것을, 심지어 남의 인생까지도 걸어버린 시도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100년은 지나야 그런 여성 작가가 나올 수 있으리라고 예상하였다. 또한, 그런 작가는 자체적으로 빛을 내뿜는, 뜨겁게 발광하는(incandescent) 존재여야 한다고도 했다. 누군가의 모방을 하지 않고 자신만의 문체가 확실하며, 고유의 천재성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작가를 묘사한 용어인데, 울프의 글에 따르면 그런 작가를 위해 희생하고 후원하거나 재산을 물려줄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이는 상당히 아이러닉하다. 하지만 울프는 작가의 재능과 그 표현만을 기준으로 그 발광의 여부를 판단했던 것이다. 정말로 순수하게 문학중심적인 시각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자기만의 방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울프가 설정한 가상 인물 "셰익스피어의 여동생" 쥬디스(Judith)일 것이다. 쥬디스는 천재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죽는 여성의 상징으로, 울프의 글은 바로 이런 쥬디스들을 위한 것이다. 쥬디스는 셰익스피어의 여동생으로 태어나, 그 시대에는 더욱 가혹했을 편견과 폭력에 희생되고 만다.

보통 이런 가상의 인물, 특히 여성이나 기타 약자를 내세우는 서사는 어떤 울분을 표현하거나 풍자를 하기 위한 것이다. 현재의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제약들을 비웃거나 타도하려는 목적이 있게 마련인 것이다.

그러나 울프가 표현하고자 한 것은 이 가상의 쥬디스를 위한 분노나 슬픔이 아니었다. (그녀가 말하는 위대한 작가 역시 그런 감정을 표현하는데 재능을 쓰지 않는 인물이다.) 과거에는 그런 쥬디스들이 한 마디도 쓰지 못하고 사라져 갔을지도 모르지만, 환경이 마련되면 다시 태어나서 글을 쓸 것이다는 믿음이었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이, 울프는 자기만의 방을 쓴 시점으로부터 약 100년이 흐르면 쥬디스가 등장할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도 표현한다. (이제 10년 남았다.)

자기만의 방에서는 시를 소설보다 우월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상당히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그녀가 두 브론테 자매와 제인 오스틴, 죠지 엘리어트(메리 앤 에번스의 필명)라는 네 명의 천재 소설가들을 상정하면서도 아직은 나타나지 않은 여성 시인을 기다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녀는 쥬디스가 제인 오스틴 같은 소설가가 아니라, 앞에서 거론한대로 "여성적"인 서사에 얽히지 않으며 그렇다고 남성을 모방하지도 않는 "양성적인" 위대한 작가들의 반열에 드는 "시인"으로 탄생할 것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위대한 사상가는 양성이라는 개념은 원래 새뮤얼 존슨의 것이다.) 물론 울프가 시라는 형식 자체를 중시하거나 소설을 경시했다고 해석하기보다는, 인류 보편적인 경험이나 이상에 대한 작품의 빈 자리를 아쉬워했던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이 깊은 부분은 울프가 말하는 샬롯 브론테와 제인 오스틴의 대조이다. 샬롯 브론테는 제인 에어(Jane Eyre)에서, 캐릭터에 스스로 빙의된다. 제인 에어의 분노와 먼 미지의 땅, 모험에 대한 갈망은 어느 순간 샬롯 브론테의 목소리로 대체되고, 그렇기 때문에 어색하게 끝나는 장면이 연출된다는 것이다. 소설 속 캐릭터를 온전히 살리는데 쓰여야 할 열정으로 분노를 표현하는 샬롯 브론테는 제인 오스틴보다 재능이 뛰어났을 수도 있지만, 상기한 이유로 인해 결과적으로 더 뛰어난 작품을 쓰지는 못했다는 비평이 이어진다.

여기에서, 울프의 시선은 정말로 철저하게 문학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제인 에어의 독백은 페미니스트의 시각으로는 문학적인 것과는 별개로 더 높은 가치를 가진 것일 수 있겠지만, 울프는 그것에 관심이 없다. 제인 에어의 독백이 결국 작가 개인의 울분과 답답함을 해소하는데 쓰였다는 이유로 그 문학적 가치를 낮게 본다는 취지의 서술은 굉장히 흥미롭다. 현대인의 입장에서 이런 비판을 제기하기는 굉장히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이렇듯 자기만의 방은 자전적 에세이이기 이전에 자신의 주관이 굉장히 뚜렷하게 드러나는 문예비평인데, 현대의 기준으로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표현들도 상당히 많기 때문에 다시는 제도권에서 나올 수 없는 류의 비평이다.

울프가 100년 뒤에 오길 고대하던 위대한 여성 작가의 등장이 요원해 보이는 이유도 이와 연관되어 있다. 울프의 방식대로 보면 점점 더 개인의 울분인지 사회에 대한 비판인지 불분명한, 재능을 분노에 낭비하는 글이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않을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거대 서사에서 오히려 점점 더 미시적으로, 주변으로 스며드는 문학은 이미 울프가 기대하던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간지 한참 되었다. 울프는 전투를 치르는 글, 항변하는 글, 가시적인 인간관계를 그리는데 집중된 글, 아픔의 글은 넘어서야 하는 대상으로 보았는데, 거의 100년이 다 된 지금 그런 글은 더욱 많아졌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런 글에 대한 가치판단을 떠나서,울프의 이상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거의 진전이 보이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은 여성과 문학에 대한 글을 넘어서는 의미를 갖게 된다. 자기만의 방은 고전문학의 끝자락에 서서도 그것이 끝자락임을 몰랐던 것으로 보이는 한 지성인의 외침의 흔적이다. 울프는 1차 세계대전을 겪고 난 후의 환멸에 대해서도 서술하는데, 또 한 번의 잔혹한 세계전쟁을 이을 더 큰 환멸에 대해서는 짐작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환멸 이후에 으레 이어지게 마련인 쾌락주의와 자조, 끝없는 상대주의와 허무주의, 전복과 단순 유희, 대량생산을 겨냥한 글을 예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시대가 끝자락임을 알았는지도 모른다. 단지, 그녀가 그렸던 "양성적인" 또는 성별이 중요치 않은, 재능을 전적으로 표현할 수 있으며 성별 간의 싸움에 몰두하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는 위대한 작가는 "자기만의 방"이 당연시되는 현대에 와서는 더더욱 보기 힘든 생물이 되어버렸다. 울프가 위대한 작가의 기본적인 환경 요소로 꼽았던 최소한의 수입과 공간은 "쥬디스"는 물론이고 "윌리엄"의 재능도 담보해주지 않는 것이다.

울프는 쥬디스가 수많은 무명의 배고픈 여성 작가들의 토양에서 태어나리라는 말로 케임브릿지의 여성들을 격려하고자 했다. 씨를 뿌린 곳에 무엇이 나리라는 믿음에서였다.

문학에 대한 울프의 이상이 애초부터 오류였다고 보기에는 그녀가 말하는 위대한 작가들은 분명 존재했었다. 비록 제약을 받아 그 재능을 다 펼치지는 못했지만 천재적이었던 것으로 암시된 네 명의 여성 소설가도 분명히 존재했었다. 모든 글의 가치는 상대적이라는 말로 비켜가기에는 그들 모두의 작품세계가 너무 훌륭했었다. 어디에서 무엇이 상실된 것일까.

어쩌면 쥬디스들이 이미 도처에 와 있지만, 그 모습이 울프의 이상과는 현저하게 다른 것일뿐인지도 모르겠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오늘날 누가 버지니아 울프에 공감할 것인가.

For @sndbox

This post explains the main themes found in Virginia Woolf's A room of one's own. In the book Woolf awaits for the great, androgynous-minded woman writer/poet, whose works will reach beyond gender debates and relationship-based romances. This long-awaited woman has not yet arrived, in my opinion, because of the vast changes in the literary and cultural scene since Woolf's day. It is at once fascinating and trag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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