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엄마 이야기.

오늘은 자식들이라면 모두 공감할 엄마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울엄마는 진짜 멋지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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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살 즈음으로 기억한다. 엄마가 ‘영어’를 알려달라고 했다. 에이와 비는 어떻게 쓰는 것이냐고. 노트 한쪽을 찢었다. A a 를 적고 그 밑에 ‘에이’, B b를 적고 그 아래에 ‘비’ 라고 적는 식으로 해서 엄마에게 주었다.
“엄마 이 두 개는 다 에이야. 영어에는 대문자가 있고, 소문자라는 게 있는데 왼쪽에 큰 게 대문자고, 오른쪽에 작은 게 소문자야. 모양은 조금씩 다른데 같은 글자니까 두 개를 다 외워야 해. 이거 다 외운 다음에는 어떻게 읽는지 알려줄게.”
엄마의 눈이 초롱초롱했다. 엄마의 눈 속엔 엄마가 있었다. 혀가 미려하게 굴러가는, 영어 하는 엄마.

바람과는 다르게 다음번 진도는 빠르게 나가지 못했다. 엄마는 좀처럼 p와 q를 기억하지 못했다. 대문자 I와 소문자 l을 구분하는 것도 힘들어했다. 그도 그럴 듯이 엄마는 많이 바빴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새벽밥을 지어 인부들을 먹여야 했고 아침 설거지 끝나면 바로 점심 준비. 점심 설거지 끝나면 부리나케 나가서 장을 봐서 그날 저녁과 다음날 점심까지를 대비해야 했다.

‘함바’라는 사업이 남들 눈엔 돈 잘 벌리는 독점 사업인 것 같아도 그것은 대규모 아파트 건설 현장을 찾아다니는 ‘기업형 함바’를 운영하는 사람들 이야기였다. 엄마의 조립식 건물 안에 있는 식당에는 많을 땐 오십여 명, 적을 땐 이십 명 전후가 밥을 대어 먹으러 왔다. 그당시 식대는 3500원 ~ 4000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사람들이 보통은 석 달 ~ 육개월에 한 번 몰아서 밥값을 지불했는데, 엄마는 돈을 받으면 가장 먼저 외상값을 갚았다. 여기저기 갚고 나면 한 달여 생활비가 남았다. 한 달은 외상없이 장을 보다 다음 달에 다시 돈이 돌지 않으면 외상을 달기 시작했다. 작은 건설 현장에는 밥값을 떼먹고 도망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전화도 받지 않고 잠적할 기미가 보이면 엄마는 가끔 내 전화를 빌렸다. 전화기를 받아들고 나를 내보내고 난 후에는 한참을 소리 지르고 싸우는 소리가 문 밖으로 새어나왔다. 힘들 땐 엄마의 몸무게가 38킬로그램까지 줄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 저런 연유로 엄마의 영어공부는 쉽지 않았지만, 엄마는 행복해했다. 어렸을 때 일등 아니면 한 적이 없다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을까. 외할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계속 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그 시기가 생각났을까.
하루는 목 놓아 울기도 했다. 내가 적어주었던 (이미 너덜너덜해진) 알파벳 표를 앞에 두고. 단 한 시간을 집중할 틈이 없이 고달픈 하루가 서글퍼서 그런 것인가 넘겨짚고 방문을 닫았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눈이 퉁퉁 부어서 나온 엄마는
“나 이제 진짜 바보가 됐나 봐. 평생을 밥만 하고 살다가 머릿속에 밥만 찼나 봐.”
라고 했다.

엄마가 알파벳을 다 외웠을 때 나는 스물 두 살이었다. 당시 엄마는 건설 경기가 잠시 안 좋아 함바 일을 쉬고 있었다. 어느 날 전화를 한 엄마는
“엄마 지금 고모네 가게 봐주러 왔는데. 담배 디스가 티, 에이치, 아이, 에스 맞아?”
하고 물었다.
“응. 엄마. 맞아.”
“그럼 손님이 물어보면 이거 주면 되지?”
“응. 디스에다가 피, 엘, 유, 에스 작게 쓰여 있으면 그건 디스 플러스야 엄마.”
“알았어. 모르는 게 있음 또 전화할게.”

전화를 끊고는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왜 울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엄마는 지금도 가끔 전화로 물어본다,
“‘씨 오 에프 에프 이 이’가 커피고 ‘씨 에이 에프 이’는 뭐냐?”

엄마는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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