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해두고 싶은 이야기

오늘 아침에 출근길에 읽은 이야기인데 계속 하루 종일 생각나서 이 공간에 옮겨둔다.
처음엔 페이스북에 올라온 영상을 봤는데 가디언지에도 관련 기사가 올라왔더라.

https://www.theguardian.com/world/2018/jul/25/swedish-student-plane-protest-stops-mans-deportation-afghanistan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번 주 월요일 스웨덴에서 터키로 가는 비행기를 탄 한 스웨덴 대학생이 같은 비행기에 아프가니스탄으로 추방되는 이민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 남자를 살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으로 자신의 모습을 찍으며 온라인 생중계를 한다. 전쟁 중인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갈 경우 이 남자는 죽게 될 운명이라는 걸 알고 비행기에 서 있는 사람이 있으면 비행기가 출발하지 못한다는 규정을 이용해 저항한 것이다. 비행기를 탄 다른 승객들이 항의하지만 이 남자가 비행기에서 내리는 걸 보기 전까지 자신의 행동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맞선다. 결국 이 남자는 비행기에서 내리게 되고 이 여성의 행동은 온라인에 급속도로 퍼지고 여러 매체에도 보도가 되었다.

어디가 바닥인지 모르겠는 끝없는 혐오의 시대를 살아가는 와중에 잠깐이나마 감동과 인류애를 느끼며 숨통을 돌릴 수 있었던 고마운 이야기이기에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스스로에 대한 반성을 하게 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내가 저 상황이었다면 이라고 수백번 되뇌여봐도 나는 도저히 저렇게 용기있는 행동을 할 수 없었을 것만 같다.
저기서 빠른 판단력과 결단력으로 일어서서 항의를 할 생각을 한 것도 그렇고, 바로 생중계로 온라인에 알림으로 사람들에게 이 문제를 환기시킨 것도 그렇고...
나였으면 그냥 그 사실을 알고도 불편한 마음을 없애기 위해 모른 척했거나, 할 수 있는 최대의 행동은 일행이나 옆 사람에게 쑥덕쑥덕 이건 좀 아니지 않나 궁시렁거리는 정도의 비겁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설령 없는 용기를 짜내고 짜내고 짜내서 일어나서 처음에 항의를 했더라도 주변 사람들이 '너만 승객이냐', '내 시간도 소중하다', '이 비행기를 타고 있는 다른 승객들은 생각 안하냐', '이건 우리나 파일럿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국가 법이 이런 걸 너가 뭐가 잘났다고 그러냐 '등의 이야기를 하며 나를 공격할 때 저 여성처럼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고 단호하게 '당신의 시간과 저 사람의 목숨 중에 뭐가 당장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는 건 옳지 않다', '다른 승객들은 목적지에 도착한다고 죽지 않지만 이 사람을 죽을 것이다'라며 맞대응할 수 있었을까? 그저 어버버버 거리며 '그것도 맞긴 맞는데...'하며 무력하게 있었을 게 너무 생생하게 상상되어 굉장히 부끄럽다.

영상을 보면 중간에 한 영국남자가 굉장히 화가 나서 여성의 핸드폰을 빼앗으며 항의하지만 승무원이 제지를 하고 다시 돌려준다. 뒤늦게 한 터키인이 저 여성이 옳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지한다는 말을 하고 또 뒷자리에 있던 축구선수단도 함께 일어서서 연대의 신호를 보낸다. 그리고 끝내 그 아프가니스탄 남성이 비행기에서 내리자 많은 사람들이 함께 환호한다.
시드니 루멧 감독의 명작 <12명의 성난 사람들>의 현실 버전을 보는 느낌이다. 이런 일이 현실에도 일어날 수가 있구나.

그에게 법과 질서를 이야기하며 왜 민폐를 끼치느냐, '이건 너네 나라(스웨덴)의 법이다'고 항의하는 사람에게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우리 나라 법을 고치려고 한다. 맘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Yeah. I'm trying to change my country's rules. I don't like them.)'라고 말한다. 그리고 각종 시위나 농성, 파업, 난입 행위 등의 저항운동을 보며 적법성을 따지고 표현의 방식이 잘못되지 않았냐며 딴지를 걸며 실상 아무런 변화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의 입장에 무게를 실어주거나 그저 수수방관했던, 그리고 여전히 그러고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결국 저 추방당할 뻔했던 남자는 어떻게 됐을까?
잘 모르겠지만 -그리고 제발 안 그랬으면 좋겠지만- 아마 좌석이 남는 그 다음 비행기에 강제로 실려 추방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게 현실의 '법'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저 여성의 저항이 아무런 의미없는 헛수고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어쨌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 영상을 봤고, 또 공감하는 목소리들이 나오고, 무언가가 조금씩은 변할테니까. 세상은 그렇게 변해왔고 또 그렇게 변해갈 것이다.

며칠 전에 안타깝게 돌아가신 故 노회찬 의원이 생각난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가장 그와 어울리지 않는 방식으로 삶을 마감한 것 같아, 그리고 여전히 할 일이 많고 그가 필요한 사회에서 너무 일찍 사라져버린 것 같아 며칠 째 계속 힘들었다.
그를 온전히 지지했던 기간은 매우 짧았고 이후 정의당과 그의 행보에 많이 실망하여 별로 좋지 않았던 시선을 가지고 있었으나 막상 그가 이렇게 가버리고 나니 그 빈자리가 정말 크다는 게, 그리고 생각보다 내가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고 또 많이 좋아했음을 뒤늦게서야 깨닫고 있다.

그는 자신이 받을 피해와 욕 먹을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 소신있게 행동한 강단있는 사람이었다. 법이 이렇기 때문에 안 된다는 무기력한 태도가 아니라 법이 부조리하면 바꿔야하고 지금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의 수가 적고 힘이 약해도 꾸준히 이야기를 하다보면 바뀔 것이다는 큰 비전을 가지고 늘 소수자와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 노력해온 사람이었다.
사회 각계 각층의 정말 다양한 사람들과 단체에서 그를 추모하고 그와 얽힌 추억들을 이야기한다.
그만큼 그가 수많은 약자와 소수자들을 위한 정치인이었고, 실제로 그 많은 사람들과 현장에서 함께하며 발로 뛴 진정성있는 정치인이었다는 뜻일 것이다.

나같이 비겁한 겁쟁이는 참 많은 부분을 저렇게 소신있게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빚지고 살고 있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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