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를 생각하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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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세간에서 말하는 4대 성인이라는게 있다. 독일의 어느 학자가 만든 말이라는데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공자, 예수 이렇게 4명을 뽑는다. 시대별로 보면 석가모니가 가장 오래되었고-기원전 560년대- 그다음이 공자-기원전 550년대- 그리고 소크라테스-기원전 400년대- 예수 이렇게 된다.

이렇게 4대성인을 이야기할때 소크라테스와 공자는 우리가 확실히 옛날 사람이라는 걸 느끼면서 산다. 그들은 일반 사람들처럼 제자들을 두었고, 결혼을 했으며 자식을 낳았다. 그리고 그 제자들이 커서 스승의 이야기를 수없이 많이 남겨두었으며, 언제나 스승을 칭송하며 살았다.

석가모니 역시 예전에는 수많은 과장된 신화와 같은 이야기가 섞이며 신화속 존재가 아닌가 싶었지만, 20세기초 인도를 점령한 영국의 고고학적인 발굴성과로 인해 신화속 이야기를 걷어낸 석가모니의 사람 모습을 확인할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예수는 사람들에게서 신화적인 존재로 취급을 받는다.


예수의 이야기가 기록된 복음서들을 쭉 읽다보면, 이게 진짜 우리와 함께 살았던 인간인가? 라는 의문이 들게 된다. 나 역시 그랬다. 죽은자를 되살아내고, 병을 고치며, 귀신을 쫓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며, 굶주린 사람에게 수많은 음식을 나누어주는 그렇기에 예수는 다른 성인들과 달리 무언가 신적인 존재로 다가온다.

한번 다른 성인들의 이야기들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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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먼저 석가모니 싯다르타는 지금의 네팔에 위치한 룸비니 지방을 다스리는 왕의 왕자로 태어났다. 전설의 이야기지만 지나가던 수도자가 싯다르타를 보고 '수도자가 되면 붓다(부처), 왕이 되면 전륜성왕'이라는 이야기를 남겼다고 한다. 그래서 싯다르타의 아버지는 그를 왕궁내에서만 키웠고, 아무것도 모르는 싯다르타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왕궁에서 조용히 컸다고 한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왕궁 밖으로 우연히 나가게되었고, 거기서 죽은자, 병든자, 늙은자를 보고 출가의 뜻을 품게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출가하려 하였으나, 아버지가 그를 만류했고, 대신 결혼해서 자식을 낳으면 출가를 허락해주겠다는 이야기를 한다(아마 가족을 이루면 책임감에 더 출가하겠다는 이야기를 못하겠다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싯다르타는 가족을 이룬후에도 결국 출가를 했고, 부인과 자식을 남겨둔채 뜻을 이루기 위해 길을 떠났다. 여러 스승을 두고 도를 구했지만 결국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혼자 깨달음을 얻었고, 그리고 그 후 무려 40~50년간 자신의 깨달음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다녔다.

그랬기에 싯다르타는 후대의 수많은 신화적 과장과 상상이 붙어 우리가 흔히 아는 불교의 부처님 모습처럼 변해버렸지만, 그 당시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를 존경하는 사람도 많았고, 여러 역사에 따르면 자신의 고향을 침범하려는 국가들에게 편지를 써서 고향의 침략을 세번이나 막았을 정도였다.

그가 죽을때 그의 제자들 중에서 어느정도 경지에 이른 사람만 1200명이나 되었다고 하며 수만명에게 영향력을 끼칠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사후 그의 가르침은 수많은 제자들에게 걸쳐 전해졌으며, 그의 사후 100여년 후 인도를 처음으로 통일한 아소카 대왕이 그의 가르침을 받들어 제자들을 모아 불교를 결집하고, 그의 생전 활동했던 곳에는 커다란 석주들을 세워놓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석가모니가 실존인물이라고 믿을수 있게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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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옛날 중국 춘추전국시대 노나라에서 태어났다. 사생아라는 이야기도 있고, 사회의 밑바닥에서 출발한 것은 확실하다. 그 역시 공부를 하다가 30세에 중국을 떠돌며 유랑생활을 시작했는데, 그가 명성을 얻고 널리 알려진건 60대 이후 어느정도 학식이 쌓이고 수많은 제자들이 공자를 따르면서부터였다. 그전까지는 공자 역시 당시 수많은 유세객들 중에 하나였다.

공자는 유랑생활을 하다가 결국 고향인 노나라로 돌아왔는데, 그의 학식은 전국 누구나 탐냈지만, 그가 가진 세력을 부담스러워 하기도 했고, 그의 당시 철학이 중국에 받아들여지기에는 너무나 혁명적인 철학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공자는 살아생전에는 고생을 많이하고, 실패와 좌절도 많이 맛보았다. 제자들이 먼저 죽기도 하고, 아끼는 제자는 정쟁에 휘말려 처형되어 시체가 공자에게 보내지기도 하였다.

그렇게 공자는 실패한듯 보였지만, 그의 가르침은 제자들을 통해 수백년간 이어졌고, 그 후 진나라를 멸망시킨후 한나라가 들어섰을때 공자의 유학은 중국을 넘어 아시아 전체에 영향을 끼칠 정도가 되었다.

그는 결혼도하고 자식을 두어 손자까지 두었는데, 손자는 자사라는 인물로 그가 나중에 할아버지 공자의 이야기를 엮은 논어를 편찬하며 할아버지를 기렸다. 그후에도 후손들은 공자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각 왕조의 우대를 받기도 했다. 공자의 일대기를 집편한 사기의 공자세가도 사마천이 직접 공자의 고향에 방문해 공자의 후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얻은 정보로 쓰여졌다고 할정도이기에 공자가 실존인물이라는것은 믿을수밖에 없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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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예수는 어떤 느낌일까? 성경의 복음서를 통해 추정을 해보면, 예수는 일단 갈릴리 나사렛지방사람이라고 한다. 그리고 목수의 아들이기에 목수로 살았다고 추정되어진다. 그리고 어느정도커서는 마찬가지로 제자들을 이끌고 공생애의 삶을 살았다고한다. 이 기간이 짧게 잡으면 3개월, 길게 잡아도 3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보니 위의 두 사람과 대비될 정도로 남은 기록이 불분명하다. 여러 연구자들은 여전히 예수가 실존했다고 믿지만 기록이 불분명하다보니 전승으로 내려오는 수많은 복음서들을 통해서 그가 실존했다는 증거를 찾고자 한다.

그의 제자들은 12제자와 더불어 70명의 제자가 있다고 복음서에는 쓰여있다. 그가 이야기를 나눌때는 수천명의 사람들이 따라다녔다고 하며, 그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고, 예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고 할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로마치하 이스라엘에서는 이러한 사람들이 수십명씩 있었다는 사실이다. 복음서에도 기록된 세례 요한의 경우처럼, 로마와 결탁한 부패한 정치인들을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신비한 체험을 보여준다며 수백명을 데리고 다니는 사이비 교주들도 많았다.

로마는 이런것들 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었으며, 때로는 유화책을 때로는 탄압과 처형을 하며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었다.


예수의 가르침이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기는 하지만 대부분 파편화 되어버렸다. 그의 제자들은 공자나 석가모니의 제자들처럼 수가 많지 않았고, 어느정도 경지에 오른사람도 부족하며-아무래도 같이 활동한게 길지 않으니-제자라는 사람들도 자세히 살펴보면 좀 떨어진다는 느낌이 든다.

베드로같이 호수의 어부나, 유다 같은 과격 혁명가, 또는 아름답다는 평만 있는 요한이나, 예수 자신의 형제들..... 그리고 현대로 치면 9급공무원인 세리 마태.

복음서의 이야기대로라면 이런 사람들을 데리고 예수는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사상을 전파하며, 낡고 고리타분한 유대 전통과 구약의 병폐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다녔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싫어하고, 두려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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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예수는 전형적인 유대인과 같지 않다. 그를 다루는 복음서를 보면 예루살렘에 다녀오는 유대인의 전통을 따르는 듯 하지만 그의 출생지를 생각해보면 조금 느낌이 달라진다.

우리는 생각하기에 예루살렘 그러면 화려한 도시, 성스러운 도시, 그렇게 크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당시 로마에서는 변방 시골 촌동네라고 생각하면 된다. 근처에 다마스커스라는 시리아 총독이 있는 커다란 도시도 있었으며, 남쪽에는 큰 항구 알렉산드리아가 있다. 그리고 그리스와 로마에는 우리가 익히아는 수많은 도시들이 있다.

그리고 로마는 길을 중요시하여 수많은 길을 닦았다. 로마 가도라 불리우는 길들인데 예루살렘으로도 가는 길이 있지만 큰 길이 아닌 곁가지 길정도였다.

오히려 예수가 태어난 갈릴리 지방은 그리스-소아시아-이집트-메소포타미아를 잇는 길목의 요충지였다. 그렇기에 갈릴리 지방 사람들이 오히려 예루살렘사람들을 촌놈이라 생각하며 로마-그리스 문명을 듬뿍 받아들이곤 했다. 예루살렘 유대인들은 갈릴리 사람을 무시했지만, 갈릴리 사람들이 보기에는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야 말로 이상한 놈들 투성이였다.

그렇기에 갈릴리 지방사람 예수는 당시 유대인들을 비판할수 있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이라면 생각할수 없는 새로운 사상을 가르치고, 사랑을 전하며, 유대인들에게는 없는 혁명적인 생각들을 해낼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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