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집

*단편소설 초고이며 1,000개의 스팀이 모이면 그림책으로 다시 제작하고 모금된 스팀에 비례하여 작품에 대한 적정 지분을 다시 환급하겠습니다.

2002년에 25살 늦은 나이로 군에 입대하고 27살에 전역을 하고 나오니, 사회 초년생인 한 살 위의 형에게는 어느새 검단사거리에 신규 분양 받은 아파트가 하나 있었다.
부모님이 형 명의로 분양 신청한 아파트가 당첨된 것이었는데, 나머지 잔액을 형이 갚는 조건으로 완전히 형의 집이 된 것이다.
당시 분양가가 1억 3천이었던 그 집은 나중에 형 부부가 2억 조금 넘는 가격에 팔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기는 하지만, 형이 결혼하기 전인 노무현 정권 때 3억 8천까지 오르기도 했었다.
부모님에게 더 이상 현금 여유가 없었던 것을 알았던 나는 부모님이 형 집에 돈을 얼만큼이나 해주었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그저 3, 4천 정도로 짐작했을 뿐이다.
대학 등록금 한학기분을 알바를 해서 모아둔 돈으로 낸 적이 있던 나로서는 상실감이 꽤 있었다. 어려서부터 받은 차별 대우들은, 어쩌면 그것들이 이 모든 것의 징후였을지도 모르지만, 매우 사소한 것들이 되어버릴 정도로.

어머니는 내가 졸업 전에 주말에 편의점 철야 알바를 해서 받은 돈으로 뭔가를 사면 곧잘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 돈 줄테니 형한테 그 물건 줘라. 집값 갚느라 네 형 돈이 짼다. 형 집에서 나오는 월세는 전부 엄마한테 주고 있어.”

그리고 부모님 집의 재건축 문제로 이사를 가야할 때 굳이 형 집 근처 풍무동으로 이사를 가서 내 알바를 그만두게 했고 대신 어머니가 힘든 일을 해서 용돈을 몇 개월 주셨다.

그리고 그 사이에 어머니는 심장병에 걸려 나는 쌓인 원망을 토해보지도 못하고, 내가 부담했던 한 학기 등록금을 돌려준다던 말씀도 그냥 죄송한 마음에 없던 것으로 하자고 해버렸다.

취업을 하자마자 부모님 댁을 떠나 직장 근처에 고시원을 얻었다. 그땐 다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간신히 월세 보증금으로 쓸 500만원을 모았더니 어머니가 급하게 빌려달라고 했다. 난 부모님 댁으로 돌아갔고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나중엔 나도 부동산 문제로 부모님께 돈을 한 번 빌리기도 했지만 부모님한테 급전이 필요할 때마다, 형에게 임시로 막을 돈이 필요할 때마다 언제나 그 돈들은 내 손에서 나왔다. 9호선 호재로 나중에 크게 가격이 오른 낡은 오피스텔 하나 살 기회를 그 때문에 잃기도 했다. 40전까지는 언제나 크건 작건 순순히 돈을 빌려드렸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언제나 이런 일은 내 몫이어야 하는 것 때문에 격한 분노에 휩싸였다.

겨우 한 살 터울이었지만 형이 형수님을 소개팅에서 만나기까지 부모님은 내게 단 한 번의 소개팅도 해주지 않으면서 주구장창 형의 소개팅만 주선했다.
그는 어서 장가를 보내야 하는 장남이었고 집이 있는 아들이었으니까.

나는 죽도록 벌고 저축했다. 주말에도 알바를 하고 점심도 컵라면으로 때울 때가 많았다. 어디에도 놀러가지 않았고 친구들도 만나지 않았다. 형도 집값 갚는다며 알바를 하긴 했지만 카메라도 사 모으고 친구들도 곧잘 만났다. 나보다는 여유 있는 삶을 살았다.

내가 29살쯤 되었을 때부터 첫번째 집을 장만할 때까지,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 가지 문제로 다투기 시작했다. 월세가 나오던 상가를 팔아서 작은 아들에게도 집을 하나 장만해주어야 한다는 아버지와, 그렇게 했다간 우리 노후가 비참해진다면서 말리던 어머니의 다툼이었다.
(그렇다고 나의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결코 공정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행동은 내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행한 과거의 차별들에 대한 죄책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나에 비해 훨씬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장남으로 자란 그는 우리 가족들에게 익숙해진 서열 관계와 차별의 주도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죽고 싶었다. 나 때문에 저렇게 매일 같이 싸우는 것이 끔찍했다. 내가 회사 가서 집에 없을 때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다 들으라는 듯이 저렇게 싸우는 것도 원망스러웠다. 큰 아들한테 해주는 것은 당연하고 작은 아들한테 해주는 것은 저렇게 아까워하는 어머니가 실망스럽고 두렵기까지 했다.
친한 직장 동료에게 그런 상황을 울먹이며 토로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울면서 나에게 말했다.
“네 아버지한테 뭐라고 말 좀 해라. 다 늙어서 이제 어떻게 살라고.”
어머니의 그 말이 나를 더욱 절망시켰지만, 난 그대로 따랐다.
난 내 힘으로 잘 벌어서 살 수 있으니 걱정 마시라고 아버지에게 이야기했다.

시간이 좀 지나 형이 33살에 장가를 가게 되었다. 그 때쯤에 부모님한테 2천 정도 여유가 있었고, 난 당장 집이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그 돈마저 형한테 넘어갈까봐 걱정됐다.
계속 상가를 팔겠다는 아버지를 말리기 위해서 어머니 역시 내가 집을 사는 걸 찬성했다. 모은 돈과 그 돈을 합치고 전세 보증금 8천만원을 더해 1억 7천이 조금 안 되는 돈을 모아 김포 북변동에 오래된 아파트를 하나 구입했다. 나중에 경전철 호재를 기대할만한 곳이었다.

그리고 그 때 알게 되었다. 20대 중반의 형이 1억 3천짜리 집을 분양 받을 때 9천을 해주셨다는 걸. 각종 세금과 증여세까지 포함하면 더 많은 돈을 쓰셨다는 것을.

나는 첫 번째 집을 산 지 2년 만인 34살에 그 집을 월세로 전환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안 쓰고 아끼고 알바를 뛰어가며 6천을 모아서 월세로 바꿀 수 있었다.

하지만 결혼 비용도 필요했던 형 부부는 그 때까지도 4천만원의 빚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다. 나에 비해 건강한 소비를 하던 형이 그 집 빚을 완전히 갚은 것은 분양받고 거의 10년이 지나서였다.

나중에 형수가 아이들 교육 문제로 이사를 한 번 하고 형 식구에게 부동산 차익도 발생하긴 했다.

난 첫 번째 집을 무리해서 월세로 돌리게 되면서 병도 얻고 직장도 옮겼다. 그래도 계속 열심히 직장 생활을 하면서 모은 돈으로 38살 여름에 서울 강서구에 썩은 빌라가 급매물로 나온 것을 샀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낡은 빌라였지만 장차 목동-홍대선의 수혜지가 될만한 위치에 있었다.

그 사이 부모님은 강서구의 아파트를 팔고 김포 풍무동의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어머니가 그 때 내게도 풍무동 아파트를 사라고 했지만 대출 비중이 너무 많아 포기하고 빌라를 산 것이다.

내가 빌라를 살 때 부모님이 또 오백만원을 보태주셨다. 어머니는 천만원을 보태줬다고 우겼지만 거의 600 들여 산 중고차를 몇 번 타지도 않고 아버지를 드려서 사실 5백만원도 못 받은 것이다.

그런데 그 집에 불륜 커플을 세입자로 들여놓으면서 문제가 생겼다. 여자 계약자와 보증금을 낸 남자 간의 문제로 난 받은 보증금에 대한 가압류를 당했고 아버지가 나 대신 법무사를 들락날락하고 나 역시 지방법원에 판결을 들으러 가기도 했다.

그리고 판결이 나서 공탁금을 넣어둬야 할 때 처음으로 부모님에게 천만원 넘게 돈을 빌렸다.

그리고 금방 새로 월세 세입자를 구했고, 조금이나마 부모님에게 빌린 돈을 그대로 가지는 것에 희망을 가졌지만 어머니는 곧바로 돈을 갚으라고 했다.

많이 서운했다. 돈이 궁해서가 아니었다. 지난 시간 동안의 서러움을, 상대적 박탈감을, 형과 나는 생물학적 부모님은 같은데 증여를 해주는 부모님은 다르다는 그 괴상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몇 년 뒤에 그 기회가 왔다.
40살 여름, 3천만원을 또 급하게 빌려달라는 어머니에게 그럴 돈이 없다며 처음으로 거절하고, 그 해 겨울부터 나는 부천에 싼 집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이미 대곡-소사선 호재로 가격이 꽤 오른 동네였지만, 앞으로 신월동과 홍대를 잇는 노선이 추가될 가능성이 있는 지역이었고, 갖고 있던 돈에 세입자의 월세 보증금 정도만 보태면 은행 대출을 많이 받지 않은 채로 작고 오래된 빌라를 하나 살만한 곳이었다.
부모님이 돈을 얼마간 보태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괜찮았다.
직장 근처에 비싼 월세를 살고 있던 내게는 월세 소득을 늘리는 것 또한 매력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동네가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나치게 난개발된 오래된 부도심 마을의 형태가 마음에 거슬렸다.

그런 내게 어머니는 한강신도시 외곽에 상대적으로 가격이 낮은 구래동의 새 아파트 구매를 권했다. 여유돈의 3배가 넘는 가격에 망설였지만, 어머니는 이렇게 제대로 된 집을 사야 돈을 보태줘도 마음이 좋다며, 2천만원을 나중에 보태준다고 약속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에게 나는 항상 형의 그림자에 갇혀있는 존재였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그 원망의 깊이가 커갔고 내가 느끼는 삶의 기쁨이나 보람이 형의 그것에 비해 매우 초라하다고 느껴졌다.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살면서 형보다는 재산이 약간 많아지긴 했지만, 나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찌질해져 갔고 삶의 영역도 폐쇄적으로 변해갔다. 형에게는 아내와 두 아이들, 그들과 함께 살 수 있는 집이 있었고 두 대의 차가 있었다. 비록 형수에게 초라한 용돈을 받으며 살았지만 가족끼리 자주 국내 여행도 다니고 해외 여행도 1년에 한번 이상은 떠났다. 나와는 다르게 형이 짊어진 가장으로서의 삶의 무게가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했지만, 어찌 보면 그것 역시 내게는 올 수조차 없는, 혼자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기회였다고 여겨졌다.
형보다 내가 가난해서 지금까지 재대로 연애도 못하고 친구도 한 명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 자신이 타인에 대한 신뢰를 갖지 못하는 끔찍한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여전히 부모님을 원망하고 있다.
물론 혼자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것들도 많겠지만 과연 그것들이 내가 진심으로 원했던 것인지는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세 번째 집을 무리해서 사면서 어머니한테 받기로 한 2천만원으로 부모님을 용서하려고 했다. 형과 달리 30대 후반까지 얹혀 살기도 했으니 그 정도로 지난 원망들을 모두 날려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약속된 날이 다가오면서 전세 세입자를 구하게 되었고, 그 보증금으로 대출을 갚아 빚 부담이 줄어들면서 어머니로부터 그 돈을 받을 가능성이 조금씩 낮아지기 시작했다. 형도 어머니가 권한 사우동의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가면서 1억의 빚이 생겼다. 어머니 눈에는 큰 아들보다 재산이 많을지도 모르는 작은 아들, 딸린 처자식도 없는 내가 이제 훨씬 더 윤택해 보일런지도 모르겠다. 30대 후반에 독립해 집을 나가던 순간에도, 늘 그랬듯이 새로 산 내 옷 하나가 내게는 안 어울린다며 형에게 주라던 어머니였으니까.

얼마전 어머니로부터 오랜만에 카톡으로 연락이 왔다. 새로 산 집에 대한 등기 여부를 묻기에 상황들을 대답하고, 난 약속한 2천만원을 빌려줄 수 있느냐고 곧바로 물어봤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아직까지도 없다.

빚이 2억이든 1억 8천이든 큰 차이는 없다. 여차하면 세 집 중에 하나를 팔아도 대충 해결할 수는 있다.
하지만 내 영혼의 평안함에 있어서는 극단적인 차이가 발생한다.

어머니에게 약속 받았던 그 돈을 못 받게 되면 어떤 선택을 할까. 언제나와 같이 별다른 짓을 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병든 내 마음 속에는 슬픔과 분노로 가득 찬 극단적인 선택지들이 떠오른다.

조카들에게 유산을 남긴다는 유서를 쓰고 자살해버릴까. 그토록 큰 아들 쪽만 애지중지하시는 부모님에게 원망 가득한 선물을 남기기 위해.
부모님이 남겨주실 유산이 얼마가 되든 다 포기하고 깨끗이 가족들과의 관계를 청산해서 철저히 혼자가 될까. 빌어먹을 2천만원 따위로 모든 것을 용서하려 했던 내 자신의 자존감을 위해, 차별이라는 족쇄에 갇힌 내 비뚤어진 영혼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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