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비게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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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길의 끝에 물기 젖은 아침 해가 떴다. 내비게이션은 어제와 다른 길을 알려 주었다. 십여 km쯤 돌아간다고 해서 오늘 주어진 RC를 모두 소모하는 것은 아니다. 2차선 산길을 굽이 돌아 알지 못하는 4차선 고속화 도로를 타더니 어느새 더 깊은 산길로 인도했다. 통행료가 필요한 8차선 도로에 들어설 때는 동쪽 하늘 산꼭대기 한 뼘 위에 잘 닦은 주홍색 쟁반 같은 해가 빛날 찰나였지만, 안개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도심을 피해 달아나는 듯 내비게이션은 이내 2차선 시골길의 휜 척추를 따라 달렸다. 낯선 아침 풍경을 걷어가며 살아있는 육신 한 개가 가속 페달을 밟았다.
내비게이션은 차가 과속 방지턱을 타고 날아가지 못하도록 꼼꼼하게 위치를 체크해 주었고 구간 단속 시에는 평균 속도를 표시하는 친절을 발휘했다. 수십 개의 속도위반 단속 카메라를 지날 때마다 똑같은 말을 여러 번 청취하는 것은 어머니의 무한 반복 잔소리 같았다. 땅에 묻힐 때만큼 서늘하지는 않은 것이다. 창문을 타고 넘어오는 서늘한 아침 공기 때문에 옷깃을 여미지는 않았다.
휴게소에서 담배 한 대 피우고 길을 서둘렀다. 양복쟁이일 때는 더없이 편했었던 옷과 구두가 이제는 꽉 죄는 수의를 몸에 두른 것처럼 어색했다. 다시 올라선 고속도로를 질주하다 미끄러져 내리면 도착지 근처였다.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길 찾기에서 어제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애꿎은 동네를 한 바퀴 돈 다음 내비게이션에도 안식을 주었다. 죽은 자의 처소를 향해 멀리 돌아왔어도 아직 커피 한 모금 마실 여유가 있었다. 다행히 작은아버지 입관식에는 늦지 않았다.

와이셔츠 주머니에 담뱃갑을 넣고 빼고 하다가 묵주를 발견했다. 언제부터 와이셔츠에서 기도 모드로 잠들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장례식 중에 묵주를 발견한 게 우연일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나는 기어가 잘 물려 돌아가는, 복잡하고 섬세하지만, 가늠하지 못할 만큼 커다란 기계의 작은 나사가 아닐까. 냉담은 그만하라는 관용의 표식이 아닐까.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작은아버지 장례식장 간다고 했더니 엄마가 넣어 놓으라고 해서 그렇게 한거야.

어쩐지 우연치고는 너무 그럴싸했다. 엄마 말 잘 듣는 딸이다. 장모님은 우리를 포함한 처가댁 가족사를 줄줄이 꿰고 있는 주치 점쟁이를 정기적으로 방문하시며 가족의 안녕을 위해 전국의 유명 사찰을 찾아 꾸준히 기도드리시는 독실한 불교도이다.
염주를 묵주로 잘못 알아들었나... 가끔 비틀거리는 걸 보면 아내의 반고리관 근처에는 듣고 싶은 것만 선택 가공하는 특수 기관이 장착된 건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 부부에게도 시간의 흔적이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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