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을 하여 차를 주차하고 내리는데 문득 이 나무가 보이네요. 이런 작은 나무가 있어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몇년을 보아온 곳이고 가끔은 수업을 여기 동산에서 하기도 했으니 나름 이 동산의 나무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나무를 훑어보다가 밑둥을 발견하게 되어 깜짝 놀랐네요.
잘려져 나무 밑둥만 있던 곳인데 그 밑둥 사이에서 가지가 돋아 다시 나무로 자라나고 있던 거였더라고요. 저정도 자라날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을 텐데 잘려진 밑둥에서 저정도 키워내는 동안 인지를 못하고 있었던 거지요. 참 무심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아무도 바라봐주지 않음에도 조금씩 키워내고 있는 나무의 부단함에 감탄이 들기도 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보다가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급히 사진기를 꺼내들고 찍었어요. 그 때 출근하시던 분이 뭘 그렇게 열심히 찍냐고 그렇게 찍어서 어디 파는 거냐고 물어보시더군요. 그래서 이 나무를 보시라고 했더니 밑둥에서 언제 이렇게 자라난 거지 하며 신기해 하십니다.
척박한 상황에서도, 그 누구가 돌보지 않아도 부단히 자라난 저 나무처럼 아이들도 자라고 있습니다. 몸도 자라고 있지만 마음이 그렇지요. '어, 전에 안 그러던 녀석이 왜 저러지?' 싶을 때가 있지요. 갑자기 그 아이가 변한 것은 아닐텐데 그동안은 느끼지 못하다 어느 순간 그 변화를 깨닫게 되면 마치 그 아이가 갑자기 그렇게 된 거 같이 느껴지지요. 마치 어느 순간 솟아난 거처럼 자라나 있는, 저 나무처럼요. 그 아이가 그렇게 변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겪고, 무수한 생각을 하며, 주변에 조금씩 자신의 변화를 얼마나 많이 드러냈을지요. 그러한 작지만 힘겨운 변화를 알아채지 못 함이 못내 미안할 때가 있습니다. 늘 껄렁대며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는 아이가 있습니다. 교사 입장에서 호감이 가는 모습은 아니지요. 오늘 수업을 하며 멍 때리고 있길래 잘 모르면 옆에 친구에게 물어보라고 응원을 해주었습니다. 마지 못해 물어보기는 하지만 툴툴대는 모습이 역력하더라고요. 조금은 괘씸해 보이긴 했지만 어깨 한번 토닥여 주고 웃어주고 말았습니다. 수업 후반에 문제 풀이에 대한 공유 시간을 가졌는데요. 활동지의 뒷부분 어려운 문제를 한 학생이 나와서 어렵게 풀어내고 그에 대해 설명을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문제풀이를 발표할 때 교사인 저를 바라보고 하는 경우가 많아 일부러 문제 풀이를 시켜놓고는 교실 뒷편에 서 있습니다. 학생들 사이에 서 있으면 자연스레 발표하는 학생이 다른 학생들을 향해 발표하게 되니까요. 그렇게 자리 잡은 곳이 아까 툴툴대던 아이 곁이었습니다. 그 순간 '아, 나도 저렇게 나가서 문제를 풀어보고 싶다.'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바로 그 툴툴대던 아이가 혼잣말을 한 것이더군요.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소 수업도 잘 안 듣던 아이라 공부에는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수업이 끝나고 그 아이랑 몇마디 나눠보니 그동안 부족했던 공부를 따라잡고자 학원도 다니고 친구들에게 이것 저것 물어보며 배우려 하고 있었단 것을 알게 되었죠. 근데 그럼에도 생각보다 실력이 오르지 않아 짜증이 나기도 하고 그랬다고 하더군요. 사람을 대함에 '아,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구나.'하고 단정지어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변하지 않을 것으로 치부하게 되죠.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다.'라고 파스칼이 말했고 늘 변하는 자신의 모습과 생각 속에서 실존을 고민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데카르트가 말했듯 사람이란 변하는 존재라는 게 분명한데 말이죠. 아이들의 변화에 좀 더 세심한 시선이 필요하리라 생각이 듭니다. 그런 작은 변화를 느끼지 못 하면 어느 순간 변해버린 아이들에게 배신 아닌 배신을 당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수업이나 교과에 대한 이야기 말고 아이의 삶에 대한 이야기나 생각에 더 귀기울여야 할 듯 합니다. 단순히 수업 상황 속에서의 한가지 일화로 그 아이를 단정지으면 안 되겠지요. 다음 수업 시간엔 그 툴툴대던 아이에게 문제 풀이 발표를 시켜봐야겠습니다. 사실 그 아이가 부러워하던 앞에서 발표하던 아이의 풀이는 중간 쯤부터 틀린 것이었고 다른 아이들의 도움으로 완성시킬 수 있었죠. 전 완벽하게 문제를 푼 아이에게 문제 풀이 발표를 잘 안 시키거든요.(요 부분은 다음에 이야기하겠습니다.) 어찌되었든 그 아이의 툴툴댐에 나무라지 않고 그 뒤에 숨은 이야기와 그 아이가 변하려는 모습을 알게 되어 너무 다행인 시간이었습니다.
어제 근의 공식을 수업하고 있었습니다. 근의 공식이라는 말을 할 때마다 여기저기 웃음소리와 소곤대는 소리가 들렸죠. 낯선 용어라 그런가 생각했는데 칠판에 '근의 공식'이라고 쓰자 그제야 '아. 근혜 공식이 아니고 근의 공식이네. ㅋㅋㅋ'라는 말이 들리더군요. 순간 허탈했습니다. 근의 공식을 유도하는 부분이라 아이들이 통 이해를 못 해서 설명하느라 제가 그 내용에 집중하고 있어서 아이들 상황에 귀기울이지 못 하고 있던 상황이었죠. 아이들이 근의 공식의 유도과정을 완벽히 이해해야 한다는 욕심에, 아이들이 이를 자신들만의 힘으로 해내지 못 하리라는 섣부른 판단에 혼자만 잔득 힘이 들어가서 예전에 강의식으로 수업하던 때로 돌아갔나 봅니다. 저 혼자 이런다고 아이들이 다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닌데 말입니다. 차라리 아이들이 서로 이야기 나누고 고민해보게 놔두는 게 나았을 텐데 말이죠. 아이들에게 맡기고 아이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게 맞았을 거 같습니다. 그리하여 아이들이 어떤 부분에서 어려워하고 어떻게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 세심히 찾아내어 그 부분을 건드려 주었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근의 공식'이 '근혜 공식'이 되어 아이들 사이에 떠도는 일은 없었을 텐데요. 아이들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아이들의 변화를 눈여겨 보아야 겠단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랬던 것이 지난 수업이었고 그덕에 오늘 수업에서 툴툴대던 아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합니다. 물론 아침에 어느덧 자란 나무를 발견한 것도 그 연장선이지 싶기도 하네요.
교사라는 것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직업으로 가르침의 전문가라 생각했었더랍니다. 근데 요즘 들어 드는 생각은 교사는 가르침의 전문가가 아니라 배움의 전문가라는 것이지요. 아이들에게서 배우고, 가르치기 위해 배우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배우는 전문가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