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prologue]
그는 노예 검투사였다. 운이 좋았다. 수많은 시합에서 끝까지 살아남았다. 지금은 어느 귀족이 운영하는 검투사 양성소의 교관으로 일한다. 양성소 안의 노예 검투사들과는 달리 외출할 수 있는 자유가 있고, 깨끗한 잠자리와 부족하지 않은 음식과 적지만 매달 급료를 받는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 기회를 감사히 여기며 성심성의껏 검투사들을 조련한다. 그는 이제 노예가 아니다. 중간계급이 되었다. 그는 프티부르주아가 되었다.
*프티부르주아 petit-bourgeois: 자본가 계급(부르주아)과 노동자 계급(프롤레타리아)의 중간에 속하는 소상인, 자영업자, 하급 봉급생활자, 하급 공무원을 말한다. 프티부르주아는 부르주아도 프롤레타리아도 아닌 중간적 부르주아 의식을 가진 계급이다. 지식인은 바로 이 계급에서 나온다.
- 사르트르 ‘지식인을 위한 변명’ 37쪽.
( ) 안은 ‘지식인을 위한 변명’ 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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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그는 자신이 고대 로마의 ‘전직(前職) 노예 검투사’와 다를 바 없다고 느꼈다.
(그는 프티부르주아 계급에 속하는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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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부모님 모두 좋은 대학을 나왔다. 그의 집안은 풍족하지는 않지만 배고픔으로 고통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 역시 나름 좋은 대학을 나와서 그의 지식을 학생들한테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의 집안은 부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동료 학생들이 부모님의 도움으로 편하게 등록금을 내고 공부할 때 여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힘들게 학업을 마쳤다.
그는 실력과 능력이 좋았지만, 독보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 정도의 실력을 가진 사람들은 주변에 적지 않았다. 그는 운이 좋게도 작은 대학의 교수에 임용되었다. 운이 좋았다는 말은 그 대학의 인사권자와 어찌어찌 인연이 닿았기 때문이다.
(설령 그가 노동계급 출신이라고 해도, 전문가로서 ‘성공’할 수 있었다면, 그건 오로지 복잡하고 또 결코 정당하지 않은 선별 체계에 의해서 그의 동료 대부분이 제거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가 되었건 그는 부당한 특권의 소유자인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그가 온갖 역경을 훌륭하게 헤쳐 나왔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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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담당한 수업은 학생들이 너무 많고 기자재는 부족했다. 그는 매번 학교에 이를 개선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학교는 예산 부족 등 여러 이유 때문에 이를 고치지 못했다.
그는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이런 여건을 극복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수업은 언제나 시간을 넘겼으며, 휴일에도 메일을 통해 학생들의 작업을 봐주었다. 학생들은 학교에 불만이 많았지만 그래도 그의 수업을 좋아했다. 그의 성실한 노력 덕분에 학생들의 불만은 줄어들었다.
(그는 중간계급의 중간층에 속하는 가정에 태어나서 어린 시절부터 지배계급의 특수주의 이데올로기를 주입받아왔기 때문에, 그의 직업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결국에는 그를 중간계급에 속하게 만듭니다. 이런 사실은 그가 노동자와 전혀 접촉이 없었다는 것, 그러면서도 그는 고용주에 의한 노동자 착취의 공범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어찌 되었든 그는 잉여가치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사회적 존재와 그의 운명은 밖에서부터 그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활동과 관련된 일반적인 목표는 결국 그 자신의 목표가 아닌 것입니다.)
- 학생들의 불만을 줄이는 그의 성실한 노력은 결국 학교(지배 이데올로기)에 부역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학생들은 졸업한다. 그리고 새로 들어온 학생들은 다시 열악한 교육환경에 피해를 입는다. 그리고 그의 성실한 노력은 학생의 불만을 잠재운다. 그 학생들은 졸업한다. 이 과정은 지배 이데올로기가 무너지지 않는 한 끝없이 반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