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수명(壽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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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 갑자기 와당탕 소리가 났다. 선풍기 안전망을 지탱하는 플라스틱 원형틀이 끊어져 안전망이 바닥에 떨어져 구르는 소리였다. 엄청나게 더웠던 올여름, 이 아이도 무척 힘들었던지 결국 바람의 세기를 조절하는 기능이 고장이 났었다. 하지만 약하게라도 바람을 만들 수는 있었다. 여름 내내 잘 사용했던 고마운 선풍기였다.

열 번의 여름을 이 아이와 함께 보냈다.

끊어진 플라스틱 틀은 고칠 수 없었다. 동사무소에 가서 폐기 스티커를 받았다. 선풍기에 스티커를 붙이고 집 앞에 내어 놓았다. 부품들이 잘 재활용되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으면 좋겠다.

작년 이 즈음에는 10년 넘게 사용한 백팩의 수명이 다했고, 얼마 전에는 7년을 입었던 레더 재킷이, 그저께는 생생하던 메트로놈이 죽었다. 나와 함께 했던 많은 것들이 그 수명을 다하고 떠나간다. 사물도 생명체와 같다. 말과 행동으로 직접 소통을 하지 못할 뿐이지 사물 역시 생명체처럼 서로 감정을 주고받고 관계를 맺는다.

이 선풍기는 바람이 약해지면서 자신의 수명이 다해가고 있다는 것을 알렸고, 7년을 입었던 레더 재킷은 겉의 비닐이 조금씩 뜯어지면서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렸다.

제임스 러브록은 ‘가이아 이론’에서 지구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라고 말한다. 지구는 생물과 무생물이 서로 영향을 끼치고 소통하며 조절되는 하나의 유기체다. ‘지구는 살아있다.’는 말은 단지 은유적인 말이 아니다.

‘인간관계’ 역시 생명체 같다. 한때는 서로 없으면 못 살 것 같은 연인들, 서로 위하는 것처럼 보였던 친구나 지인들의 관계도 그 수명이 다하면서 끊어진다. 어찌 보면 인간관계가 가장 ‘비생명적’이다. 함께 했던 물체와 생명체가 그 수명을 다해 우리를 떠나면 아쉽고 슬프지만, 끊어지는 인간관계는 아쉬움보다는 평안을 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