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와 사육신 1
계유정난 성공 바로 다음 날 수양은 ‘영의정부사 영경연 서운관사 겸 판이병조사’라는 이름도 꽤나 긴 조선역사 상 전무후무한 관직에 제수되어 왕을 대신해 섭정을 시작한다.
섭정 자리에 오른 수양대군은 정인지를 좌의정에 한확을 우의정으로 삼고 먼저 군권을 장악한다.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에서 자신이 세운 공을 주나라 주공(周公)에 비유하기 위해 집현전 학사들에게 교서를 작성하게 했다. 그러나 집현전 학사들은 모두 도망가고 유성원만이 남아 있다가 협박 속에 초안을 작성했다.
수양이 계유정난을 아무리 치장해도 쿠데타명분은 약했다.
그러나 군권을 장악한 수양 무리 앞에서 어린 단종의 운명은 바람 앞 등불이 되어 버렸다. 단종은 그동안 수양을 숙부로 믿고 따랐던 자신을 탓했다. 수양에 대한 밀려드는 두려움도 감추기 힘들었다.
바람 앞 등불이 되어 버린 어린 단종은
“모든 권한을 수양에게 다 주더라도 몇 년 만 이 자리를 지키면 된다”라는 생각 하에 왕의 자리를 이어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계유정난이 있었던 날부터 1년이 지났다. 민심이 수그러지길 기다리며 노심초사 왕자리를 노리던 수양과 그 측근들은 슬슬 '수양 왕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를 가동한다.
그 첫 번째는 상중이어서 안 된다는 단종의 의사를 누르고 단종을 강제로 결혼을 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계유정난 이후 수양이 왕위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보이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한 술책이었다.
실제로 당시 세간에는 수양이 곧 왕이 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광범위하게 퍼진 이 소문에 단종은 급기야 포고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 내용은 “근일에 이르러 숙부께서 나에게 이롭지 못할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난무하나 이는 간교한 무리의 선동이다. 숙부는 주공과도 같은 분이다”
주공은 주나라 무왕의 동생이다. 무왕이 일찍 죽고 그 아들이 즉위하자 숙부로서 전권을 장악하고 강력한 섭정을 편 후 왕이 성장하자 미련 없이 섭정을 그만 두고 신하의 자리로 돌아간 사람이다.
단종의 위와 같은 포고문에서 유언비어와 ‘주공’을 언급한 것은 수양이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묶어두자는 의미였다. 어린 단종의 마지막 애닮은 희망의 표출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단종의 허망한 희망에 불과했다.
수양은 계유정난으로 왕의 허락도 없이 왕의 신하들을 죽였으니 그가 물러나면 자신이 언제 역모로 몰릴 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수양과 그 측근들은 수양이 왕이 되는 것 말고는 살아 날 길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상태였다
수양과 측근들은 드디어 소년을 넘어 청년을 향해 가는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양보 받을 특단의 조치를 강구하기 시작했다. 이는 끊임없는 역모 사건 조작으로 단종을 따르는 사람들을 마구 해치는 것이었다.
수양의 뜻대로 신하들은 입을 모아 금성대군, 혜빈 양씨 등 단종과 가까운 수 많은 사람들을 역모로 몰았고 그들을 죽일 것을 계속적으로 청했다.
이에 힘없고 애처로운 어린 단종은 자기의 실날같은 희망이 어리석고 허망했음을 깨닫는다.
단종은 “더 버티다가는 나를 따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것" 이라며 비통해 한다.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잃고 어린 나이로 아버지마저 잃은 단종은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인 1455년 윤 6월 11일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형식적으로는 양위였다. 그러나 저승사자 같은 숙부의 위세에 눌려 왕위를 빼앗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때 왕의 옥새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은 이가 성삼문이었다. 양위식을 담당한 성삼문이 옥새를 부여안고 대성통곡을 하자 세조가 성삼문을 한참 동안이나 노려보았다고 전해진다.
사육신 비극의 시작점이었다.
세조는 왕위에 오른 후 단종을 상왕으로 추대하고 금성대군집에 살게 했다. 말이 좋아 상왕이지 가택연금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단종의 거처에는 군사 10명을 거느린 삼군진무 2명을 배치하여 주야로 경계와 감시를 하도록 했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왕위가 수양에게 왔다.
그가 바로 세조이다.
우리에게는 수양대군으로 더 많이 알려진 조선왕조 7대왕 세조(世祖, 1417~1468, 재위 1455~1468)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린다.
수양은 우리에게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수많은 신하들을 죽인 피의 군주로 많이 알려졌다.
그러나 수양이 왕이 되고 수양사후에 붙여진 '세조'는 부친인 세종의 위업을 계승하고 조선왕조를 크게 안정시킨 치적군주 이미지를 강하게 가지고 있다.
내가 배운 초중고 시절 국사에서는 계유정난이 쿠데타라는 것은 거의 다루어 지지 않았다.
단지 세조의 치적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배웠다.
국사시험에도 자주 출제된 아주 중요한 사안이었다.
요즈음은 어쩐 지 모르겠다. 내 초중고 시절은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사독재시절이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정권이 쿠데타로 왕위를 찬탈한 수양을 매도하지 않고 미화시키려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어쩌든 수양은 재위시절 상당한 치적을 남겼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 치적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상세히 다루겠다
왕위에 오른 세조 초기는 수많은 난관에 봉착했다. 이른바 사육신사건을 비롯하여 금성대군이 주동한 단종 복위운동과 이시애의 난 등 불안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난관들은 대체로 세조의 정통성을 문제 삼아 일어난 것들이었다.
수양의 왕위찬탈자라는 명분상의 약점은 언제든지 단종의 복위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특히 집현전 출신의 젊은 학자들이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이들은 혈기왕성한 유학자들답게 명분을 중히 여겼다.
게다가 계유정난에서 수양 편에 섰던 그들이었다. 그러나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정국주도권이 세조의 측근공신들인 한명회, 신숙주에게 넘어가면서 그들은 소외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집현전 출신의 젊은 관료들과 단종 및 문종 처가 식구들을 중심으로 단종 복위 움직임이 조심스럽게 이뤄지고 있었다.
중심인물은 성삼문과 박팽년이었다. 승정원에 근무했던 성삼문은 나름대로 세조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고 명나라 사신이 한양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1456년 6월 1일에 거사를 이루기로 했다.
“성삼문과 박팽년이 말하기를 6월 1일 연회장의 운검(雲劒)으로 성승과 유응부가 임명되었다. 이날 연회가 시작되면 바로 거사하자. 우선 성문을 닫고 세조와 그 측근들을 죽이면, 상왕을 복위하기는 손바닥 뒤집는 것과 같을 것이다.”([연려실기술] 단종조 고사본말)
그러나 이들의 거사는 채 이루기도 전에 발각되고 말았다. 성삼문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던 김질이 단종 복위음모 사실을 누설해 버린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성삼문이 거사 전날 김질에게 거사에 대해서 너무 거창하고 자신만만하게 털어놓았고 김질이 그런 큰 거사를 너무 경망스럽게 말하는 성삼문을 보고 이 거사의 실패를 직감하고 밀고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후에 거사가 실패하고 취조하는 과정에서 무신 출신인 유응부가 성삼문을 보고 저런 애송이 학자들을 믿고 이런 큰 거사를 거행한 것이 한스럽다고 말했다는 내용이 전해지니 성삼문등이 무력보다는 명분에만 치중해서 치밀하지 못하게 거사를 진행한 점은 분명한 것 같다.
거사는 실패했고 수양이 직접 국문에 나선다.
여기서 한 때 성삼문의 절친이었고 학문의 동지였고 세종의 총애를 함께 받았던 한 사람이 참담하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국문 현장을 보고 있었다.
변절자로 불리우는 신숙주였다.
성삼문과 신숙주!
이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시대나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현실에서도 이 두 사람의 유형을 자주 볼 수 있다.
그저 신숙주는 변절자, 성삼문은 충신 이런 이분법으로만 보기는 그렇다.
어떤 역사 전문가는 "신숙주 같은 지식인이 당시 만약 국가운영에 나서지 않았다면 그 혼란하던 시대가 얼마나 더 어지러웠을지 모른다."라는 말도 새겨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 말 또한 기회주의자, 출세주의자들에게는 명심보감이 될 위험한 이야기이다.
아마 우리는 적든 크든 현실에서 신숙주와 성삼문같은 상황에 부딪칠 수 있다. 거의 대부분은 신숙주처럼 처신 할 것이다.
명분과 실리!
충신과 간신!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편 세조와 사육신 2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