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와 사육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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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문의 절명시ㅡㅡㅡ

성삼문과 박팽년 주도하의 단종복위사건은 배신자 김질의 고자질때문에 실패로 끝났다.

김질의 장인 정창손의 고변을 들은 세조는 분노했다.

세조입장에서는 역도들인 사육신 국문에 직접나섰고 잔인한 고문도 세조 눈 앞에서 진행되었다.

세조는 성삼문에게 묻는다.

“너희들이 어찌하여 나를 배반하는가.”

성삼문은 단호하게 말한다.

“옛 임금을 복위하려 함이라, 천하에 누가 자기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는가. 어찌 이를 모반이라 말하는가. 나 성삼문이 이 일을 하는 것은 하늘에 두 해가 없고, 백성은 두 임금이 없기 때문이라.”

성삼문 말에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세조는 단근질과 인두질 등 잔인한 고문을 성삼문에게 자행한다.

성삼문은 시뻘겋게 달군 쇠로 다리를 지지고 팔을 잘라내는 잔학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세조를 ‘나으리’라 부르며 왕으로 대하지 않았다.

후에 사육신으로 불리어지는 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김문기 등에게도 고문이 가해졌다. 그러나 이들도 진상을 자백하면 용서한다는 세조의 말을 거부하고 형벌을 당했다.

박팽년·유응부·이개는 작형(灼刑:단근질)을 당하였고, 후에 거열형을 당하였다. 하위지는 참살 당했다. 유성원은 잡히기 전에 자기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자결하였다.

사육신 하면 성삼문이 대표적인 인물로 잘 알려져있지만 박팽년도 눈여겨봐야 한다.

박팽년은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과 문종의 깊은 총애를 받았다.

박팽년은 경술과 문장과 필법에 뛰어나 세종으로부터 ‘집대성’이라는 칭호를 받았는데 특히 필법에 뛰어나 남북조시대의 종유(鍾繇)와 왕희지(王羲之)에 버금간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박팽년은 단종복위운동으로 가문이 거의 멸문을 다해 문집은 전해지지 않는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박팽년은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울분을 참지 못해 경회루 연못에 뛰어들어 자살하려 하였다. 그러나 성삼문이 함께 후일을 도모하자고 만류해 단념한다. 박팽년은 이 때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단종복위 운동을 펴기 시작한다.

그러나 세조는 박팽년의 그런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는 체 재주많은 박팽년을 매우 총애하고 있었다.

세조는 관찰사로 나가있던 박팽년을 다시 불러 형조참판을 제수 할 정도로 자기 곁에 두고 싶어 했다.

세조는 박팽년만큼은 죽이기가 싫었다.

박팽년에게 조용히 사람을 보내 “네가 내게 항복하고 같이 역모를 안 했다고 하면 살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박팽년은 웃고 대답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세조는 박팽년도 잡아들였고 박팽년에 대한 세조의 국문이 시작되었다.

세조는 국문장에서도 박팽년을 회유한다. 그러나 박팽년은 세조를 부를 때는 반드시 ‘나으리’라고 하여 세조의 분을 돋구었다.

정말 총애했고 옆에 두고 싶어했던 박팽년이 세조를 조롱하듯이 계속 나으리라고 부르자 세조의 박팽년에 대한 사랑은 증오로 변하기 시작한다. 증오의 감정으로 분노가 머리 끝까지 치밀은 세조가 화를 내며 박팽년 입을 마구 때리게 하고 말한다.

“네가 이미 나에게 신이라 일컬었고 내게서 녹을 먹었으니, 지금 비록 신이라 일컫지 않더라도 소용이 없다.”고 하였다.

이에 박팽년은 “내가 상왕의 신하로 충청 감사가 되었고, 장계에도 나으리에게 한 번도 신이라 일컫지 않았으며, 녹도 먹지 않았다.”고 하였다. 실제로 그 장계를 대조하여 보니, 과연 신(臣)자는 하나도 없었고 신자 대신에 거(巨)자로 썼으며 녹은 받아서 먹지 않고 창고에 쌓아 두었다고 한다.

세조는 기가 찼다. 가장 잔인한 방법인 단근질로 박팽년 고문을 지시한다. 이에 박팽년은 단근질하는 쇠가 식었으니 다시 데워 가져 오라는 등 계속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사실인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이 이야기는 사육신을 미화시키기 위한 조금 과장된 게 아닌가 한다.

단근질의 고문은 당시 조선 법으로는 인두나 쇠를 벌겋게 달아오르게 하여 발바닥만을 쑤시거나 지지게 했다. 그런데 티브 사극이나 영화에서는 온 몸을 혹은 눈까지 지져버리는 것으로 나온다. 그런 장면은 조선 법으로 금지 된 과장된 것이지만 대부분은 고문을 하면서 법대로 했을리는 만무하다.

어쩠든 조선시대 고문은 그 어떤 인간도 견딜 수 없는 잔인한 행위였다.

이런 잔인한 고문에 성삼문, 박팽년등 사육신들이 고문을 참아내고 당당하게 세조를 조롱하며 약을 올렸다는 것은 조금은 과장된 이야기 일 것이다.

아마 그런 고문을 당하면 실신해서 그럴 정신도 없없을 것이다.

어쩠든 박팽년은 심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죽었다. 다음 날에는 성삼문을 비롯한 다른 모의자들 모두 능지처사(凌遲處死)당하였다.

성삼문은 아버지 성승과 함께 능지처사(凌遲處死)를 당했는데 형이 처해지기 바로 전

‘이 몸이 주거 가서 무어시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되야 이셔,
백설이 만건곤(滿乾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라는 시조를 지었다.

박팽년은 심한 고문을 당해 옥사 하기 직전

‘가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夜光明月)이 밤인들 어두우랴.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고칠 줄이 있으랴’

라는 시조를 읊고 눈을 감았다.

불발로 끝난 단종 복위사건은 단종에게는 오히려 악재로 작용했다.

단종은 상왕에서 쫒겨나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다. 또한 문종의 비였던 현덕왕후 권씨는 사후에 폐비되고 무덤이 파헤쳐지는 수난을 겪었다.

사육신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죽었고 삼대가 참화를 입었다.

세조는 사육신의 처나 딸들을 공신들의 여종으로 주었다. 성삼문의 아내 차산은 박종우에게 주어졌고, 박팽년의 아내 옥금은 정인지에게 주어졌다.

사육신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생육신(生六臣)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육신은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자 벼슬을 버림으로써 절개를 지킨 여섯 신하를 말한다. 이맹전(李孟專), 조여(趙旅), 원호(元昊), 김시습(金時習), 성담수(成聃壽), 남효온(南孝溫) 또는 권절(權節)을 이른다.

생육신 중의 한 사람인 남효온이 [사육신전]을 지어 세상에 유포시킴으로써 사육신 이들의 이름이 후세에 널리 알려졌다.

그 뒤 사육신은 고려의 정몽주와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만고 충신으로 꼽혀왔다.

사육신의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 줌)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해오다가 마침내 1691년(숙종 17) 이들의 관작과 명예가 회복되었다.

사육신과 생육신은 공식적으로는 150년 가까이 지나서야 역적이란 호칭을 떼고 명예를 회복한다. 그 뒤부터 조선 사대부들에 의해 만고 충신으로 떠 받들어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사육신 그들이 살았던 당대 가족들은 물론 150여녀간 이어지는 후손들은 노비로서 잔인한 세월을 보냈다. 대부분 사육신 직계가문은 거의 멸족 되다시피 했다.

솔직히 나는 이 역사적 상황을 보면서 역사적 고민에 빠진다.

이미 사육신, 생육신등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범접하기 힘든 만고 충신 반열에 올라 있어 냉철하게 이들을 역사적으로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현재에도 사육신을 만고 충신으로 생각하고 있는 많은 분들이 있다.

그래서 그분들은 지금부터 내가 쓰는글에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욕 먹을 각오로 사육신에 대해 내 역사적 관점을 냉철하게 밝혀보겠다.

과연 단종복위운동이 사육신 본인들은 능지처사되고 가족들은 멸족되다시피 할 만큼 가치있는 운동이었을까?

배신자 소리는 듣고 있지만 신숙주, 김질등은 당대 최고 관직까지 오르고 호화호식하다 천수를 누린다. 그들 가족 또한 조선 내내 명문가로 이름을 날리며 호화롭게 산다.

그리고 그들은 나름대로 역사에 치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정책들을 집행하는 책임자로서 이름을 남기고 있다.

이 두 경우를 비교해 볼 때 여러분들은 어떤 삶을 택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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