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신화: 유대 전쟁사와 새로운 로마
펌 줄리아스 dkimh
유대인의 시작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땅 근방에는 BC 30세기부터 약 3천 년간 고대 문명의 근간이 되는 엄청난 대국의 이집트가 당시를 통틀어 가장 발달한 문명을 갖고 있었으며, 앗시리아[1]가 대단한 강국으로 번성하다가 페르시아로 이어져 살라미스 해전[2]은 그리스에 패권을 넘겨주는 단초가 되었으며 결국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에게 가우가멜라 전투[3]를 통해 완전히 망한다. 찬란한 그리스 시대가 문을 열게 되고 그 즈음 이태리 반도에 국한 되었던 로마는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4]의 승리를 기점으로 바깥으로 정복의 기틀을 잡게 된다.
결국 로마는 쥴리아스 시저의 8년에 걸친 갈리아 전쟁의 승리를 바탕으로 오늘날 유럽의 거의 대부분 - 라인 강을 기점으로 서쪽의 유럽(영국의 3분의 2를 포함)과 이집트를 포함한 북아프리카 그리고 중동 - 을 속국으로 통치하게 된다. 그 당시에도 강국의 전쟁은 작게는 수만에서 수십만이 동원되는 엄청난 규모의 전쟁으로 오늘과 다를 바 없다.
이집트가 번성하던 시절 주위의 많은 소수민족들은 마치 오늘날 미국에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처럼 이집트로 이주(또는 노예로서의 강제 이주)하여 생을 유지하여 왔다. 이스라엘 민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한 어려움 끝에 이집트로부터 벗어나 가나안에 정착하게 되는데 정착했다고 하더라도 안정된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민족은 주위 강국으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에 시달려 왔으며 턱없이 힘없는 이 민족은 생존을 위해 처절하게 싸워야 했다.
신정정치를 통해 제사장의 가르침대로 믿고 따르는 민족은 어느 때 왕정의 시대를 맞는다. 사울을 시작으로 왕이 통치하게 된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거치고 나라가 둘로 갈라지게 된다. 북쪽의 사마리아 지역을 근거지로 세워진 이스라엘[5] 왕국과 남쪽의 예루살렘을 근거지로 유다왕국이 그것이다. 두 나라의 백성은 물론 같은 민족인 유대인이다.
본래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북쪽의 사람들이 세금과 노역의 부담을 덜어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르호보암이 거절하자 그들이 반란을 일으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을 왕으로 추대한다. 여로보암을 초대 왕으로 시작된 이스라엘 왕국은 호세아시대 까지 약 200년 동안을 번성하게 된다. 결국 앗시리아에게 이스라엘왕국은 완전히 망하게 되는데 이때가 BC 724년 경이다. 남쪽의 유다왕국도 앗시리아의 침공을 거세게 받아 유다의 도시 라기스 등이 함락되었으나 결국 살아남는다.
멸망한 이스라엘왕국 유민을 받아들이고 인구가 팽창된 유다왕국은 명실공히 솔로몬 시대 이래 갈라진 두 나라가 하나가 되는 전기가 마련되자 BC 7세기에 요시야 왕에 이르러 이스라엘 부흥의 기치 아래 대대적인 개혁이 시도된다. 강대했던 앗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를 근거지로 생겨난 바빌로니아에 의해 극도로 쇠퇴하게 되고 결국 그 근방의 패권 다툼은 이집트와 신생국인 바빌로니아의 접전으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지속되는 가운데 유다왕국은 몸살을 앓는다.
결국 BC 597년에 유다왕국마저도 바빌로니아에 의해 예루살렘의 함락을 끝으로 완전히 망한다. 이후로 이스라엘은 20세기 들어설 때까지 나라를 가져본 적이 없는 민족이 되었다. 바빌로니아로부터의 귀환 후 이스라엘은 예후드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는데 이 명칭이 오늘날 유대인(Jews)의 기원이 되었다. 그 후, 이스라엘은 페르시아, 마케도니아[6], 로마 등의 통치를 받으며 왕이 없는 신정 체제하에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그러나 비록 식민 통치하의 나라 없는 설움일지라도 자기 땅에 살았던 유대인은 AD 73년 로마제국에 의해 멸망당하여 유대인은 전 세계에 흩어지게 된다.
요세프스의 유대전쟁사
로마제국의 다른 나라에 대한 복종 방식은 매우 엄격하여 순종하여 로마법을 따르는 자는 비록 속주일지라도 그들의 통치를 인정해 주고 유지시켜 준 반면 저항하는 나라는 가차없이 모두를 죽이거나 살아남은 자를 모두 노예로 할 만큼 가혹하였다. 물론 그 당시에는 로마제국 뿐만이 아니라 다른 힘 있는 나라에서 빈번히 이러한 일은 일어나는 것이어서 로마제국이 특히 혹정을 했던 것은 아닌 것 같고 오히려 로마는 그들의 풍습이나 종교의식 등의 대부분을 인정해 주었다. 다만 로마제국에 동화시켜 제국의 공동일원체를 만드는 노력을 지속해 나갔고 모든 나라들이 그 진의야 어찌되었던 간에 동의하여 참여하였는데 유독 유대인 들만이 유일신교를 이유로 동화를 거부하였다.
끊임없이 지속되어 온 유대인들의 반항은 그들이 믿는 유일신에 의한 결속으로 너무나도 견고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로마군에 대한 지속적인 저항이 계속되었다. 오늘날의 레지스탕스에 해당된다. 그런 와중에 유대행정장관이 속주세 체납을 미끼로 예루살렘 신전에서 금화를 다량 몰수하는 사건이 일어나 예루살렘을 시작으로 불과 몇 달 만에 폭동은 유대 전역으로 퍼지는데 이때가 AD66년이다. 이 폭동의 강도는 주위 인근 나라인 그리스, 이집트, 시리아 등에 영향을 미쳐 민족 간 충돌로 번지게 되어 급기야 시리아 속주 총독이 로마군을 투입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하였으나 유대인들에게 패하고 만다. 당시의 로마황제 네로는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유대인의 폭동을 진압시키기 위하여 군단을 투입한다.
AD 70년, 6만 대군의 로마군은 결국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신전의 벽돌 하나 남기지 않는 등 건축물을 모두 파괴해버렸다. 죽은 사람이 수십만명이고 포로 등을 모두 합치면 100만명이 넘는다. 몇몇 살아남은 사람들은 최후까지 버티고 항전을 계속했는데 결국 그 항쟁은 로마군에 의해 유명한 마사다 요새의 척결로 모두 끝나게 된다. 마사다 요새는 접근하기 매우 어려운 지형을 가져 수 년에 걸친 긴 로마군 의 공략이 있었으나 그 전쟁의 끝은 아이러니하게도 로마군에 의해서라기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결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실지로 2명의 아낙네와 5명의 아이들만 살아 남았다.) 모두 960명이 자결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 중에 선택된 10명이 모든 나머지 사람을 죽이고 그 중의 한명이 나머지 9명을 죽이고 마지막으로 남은 한명은 요새에 불을 질러 모두 죽었다고 요세푸스는 그의 ‘유대전쟁사’에서 전한다. AD 73년의 일이다.
6년 전, 요세푸스도 로마제국에 대항해 전쟁을 치른 장본인이었다. 요세푸스는 유대사회의 지도자급에 속하는 집안의 출신으로 전형적인 유대교인이며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저항 끝에 그가 이끄는 유대인들은 패배를 당하고 40명의 랍비들은 로마군을 피해 동굴에 숨어들어 갔는데 그 안에서 로마군에 잡히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자는 의견이 팽배해 결국 모두 자결하기로 합의하고 구약성경에서 보편화되었던 제비뽑기를 하여 처음 뽑힌 사람이 다음 제비 뽑은 사람에 의해 죽고 하는 순서로 나중에 두 명이 남게 되어 여하튼 죽게 될 운명에 처해 있을 때 그 중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간절히 설득하여 두 사람은 로마군에 투항하게 된다. 설득한 사람이 바로 요세푸스이다.
사로잡힌 요세푸스는 당시의 군단장인 베스파시아누스에게 매우 기이한 말을 한다. 얘기인 즉슨 베스파시아누스가 나중에 로마 황제가 될 거라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계시를 내렸다고 말이다. 여하튼 요세푸스는 그 일로 살아남게 될 뿐만이 아니라 자유인으로서 생을 누리게 된다.
여기서 기이하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그 당시의 로마제국의 상황으로 보건대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될 확률은 눈꼽 만치도 없다. 베스파시아누스도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우선 요세푸스가 그 계시라고 주장하는 것을 얘기했을 때의 로마황제는 네로였고 쥴리아스 시저 이래 시저의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은 황제가 될 수 없었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는 시이저의 양자였으므로 아우구스투스의 핏줄이다. 허나 시이저의 전무후무한 영향력으로 볼 때 상징적으로 시이저의 핏줄이라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러나 베스파시아누스는 핏줄이기는 커녕 로마 명문 귀족 출신도 아닌 지방에서 태어나 말단으로부터 승급하여 군단장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더 나아가 그 때의 네로 황제의 나이는 30세인데 비해 베스파시아누스의 나이는 54세로서 모르긴 몰라도 네로가 황제직을 다 했을 때에는 아마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는 나이였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폭정의 네로는 이듬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극도의 혼란에 빠진 로마는 아우구스투스의 핏줄이 아닌 힘 있는 군단장이나 속주총독 등이 황제를 자처하고 나섰다. 황제 자리 쟁탈전으로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로 이어지는 황제는 1년 반 동안에 암살, 자살, 사살로 끝을 맺고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로 오르게 된다.(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유명한 콜로세움의 건축을 시작한 황제이고 그 아들 티투스 황제 때에 콜로세움은 완성된다.) 그러니까 요세푸스가 황제가 되리라고 예견하고 3년 만에 황제 자리에 오른 것이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 의해 세워진 콜로세움]
이것이 계시이든 아니면 살아남기 위한 도박이든 중요한 것은 나중에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된다는데 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그 말을 받아들였든지 아닌지는 확실치는 않으나 이후 그 덕에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신임을 톡톡히 얻게되고 다음 황제인 티투스 대에 까지 황제들 옆에서 비서격의 역할을 하게 되고 후일 ‘유대전쟁사’를 기술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