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심심해도, 할 일이 없어도 더이상 뭔가를 끄적이지 않는다. 그동안 다른 작업에 열중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림을 향한 순수한 호기심 혹은 성취욕같은 것들이 증발했다. 그러니까 그림에 대한 내적 동기를 완전히 상실했다. 내가 진짜로 그렸던 때는 2008년부터 2012년까지, 딱 5년 동안이었다. 짧은 기간이지만 정말 열심히 그렸고 연구했다. 한때는 아침에 일어나 작업실로 출근해서 FM라디오를 오후 2시부터 새벽 2시 프로그램까지 연달아 매일같이 들으며 그렸던 때도 있었다. 그간 그림으로만 개인전을 3번 열었다. 이제 어디 가서 그림을 주제로 대화가 진행된다면 갑자기 껴들어서 "에헴, 내가 해봐서 아는데.." 라고 꼰대짓 할 수 있을 정도의 경험은 쌓았다고 본다.
다만 어떤 단계 이후에 그 다음 단계를 밟지 못했고, 시도해봤지만 잘 안 됐고, 내 스스로의 한계를 분명히 느꼈고, 자기복제만 하다가, 그것이 지겨워져서 그만둔 것 같다. 그러나 기존의 형식을 깨고 끝없이 발전해야만 한다는 작가의 강박관념만 휴지로 돌돌 싸서 냅다 버린다면, 내가 이제껏 만들어왔던 그림의 양식은 그런대로 스스로 봐 줄만 하다. 알록달록 쳐바르니 예뻐 보이기도 하고. 사람들도 좋아하는 편이라 행운이다.
더는 순수한 내적 동기에 의해 그림을 그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낯선 사람들 앞에서 나를 소개할 때 "저는 그림 그려요" 라고 말한다. 어릴 때부터 화가를 꿈꿔왔고, 작가의 길도 그림으로 시작해서인지 앞으로 영원히 그림 그릴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내 첫번째 정체성은 '그림 그리는 사람' 이다. 아무래도 '영상 만드는 사람', 혹은 '피아노 치는 사람'은 여전히 낯설고 어색하다. 그리고 사실 모든 것이 그림과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만약 내가 다시 예전처럼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라고 스스로 생각해봤는데,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외부적인 동기에 의해서 시작될 것이다. 예컨대 갑자기 그림 주문이 쇄도해서 막 통장이 돈이 쌓인다거나.. 그러면 정말 즐겁게, 누구보다 즐겁게 붓을 들고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 '사고 싶게' 그릴 자신도 있다. 이상하게도 그림은 악기와 운동과는 달라서, 얼마간 수련하지 않고 푹- 쉰다고 해서 감각이 떨어지거나 그런 일은 없다. 어쨌건 분명한 것은 지금의 나는 그림에 전혀 흥미가 없다.
나는 정말 평생 그림만 그리며 살 줄 알았는데. 그림이 날 떠난 것일까. 내가 그림을 떠난 것일까. 조금은 아련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정희진 말대로 '인생무상' 이랬던가. 인생무상은 인생이 허무하다는 뜻이 아니라 인생에는 정해진 상이 없다는 것. 요즘 버스에서 멍때릴 때마다 이 문장이 생각난다. 뭐, 생각해보면 그림 뿐만은 아니지. 결심했던 마음들이 사라진다거나 변한다거나 하는 일들이. 그것도 한참 지난 뒤에야 그 마음들을 뒤돌아보며 깨닫는 순간들이. 끝이 있었기에 다른 것들을 시작할 수 있었기도 했고. 이렇게 작정하고 뒤돌아보니 인생의 어떤 시기들이 나뉘는 것이지, 정작 그때는 내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했을 뿐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