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적당히 고량주에 취한 채 그의 작업실을 향해 올라갔다. 등산 코스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그의 작업실은 높은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커다란 캔버스가 여기저기 쌓여있었다.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만한 통로에다가 바닥은 물감이 묻은 휴짓조각으로 가득했다. 방문자로 하여금 고독한 골방 예술가 이미지를 충족시켜줄 만한 충분한 지저분함이 연출되어 있었다. 그나마 내가 온다고 하여 청소한 결과라고 하니, 그 전의 광경은 흡사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업실과 비견될 만했을 것이다. 마련된 의자에 앉았고, 붓을 든 홈커밍보이의 첫 눈빛을 받았다.
누군가의 모델이 되어보기는 처음이다. 내 모델을 섰던 사람들은 이런 느낌이었구나. 그리는 주체에서 그려지는 대상으로 변경된 역할을 수행하는 느낌은 굉장히 묘했다. 모델이란 무엇인가. 모델은 캔버스 앞면이 아닌 뒷면만을 응시해야 한다. 시각에 의존하는 화가와 달리 모델은 사각사각 들려오는 붓질 소리만 들으며 청각에 의존한 이미지를 상상한다. 또 모델이란 뭔가를 적극적으로 하는 사람 앞에서 최대한 뭔가를 적극적으로 안 해야 되는 입장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기란 훈련된 사람이 아니면 좀처럼 어색할 수밖에 없다. 사과처럼 가만히 있으라! 라며 항상 역정을 냈던 세잔은 지금이라도 모델에게 사과해야 한다.
내적 서사가 빈약하여 곧 지루해질 사람이라 할지라도 언제나 첫 만남에서만큼은 서로가 호기심의 대상이 된다. 각자의 자리에 앉아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답했다. 내 질문에 그의 모든 답변은 단정적이었다. 적어도 그에게 그림에서만큼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모호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망설임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고 부담스러울 정도로 피아식별이 분명했다. 마치 세상의 모든 기준이 그의 입에서 판가름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엇이든 단언하는 사람에겐 주장의 진위를 떠나서 묘한 매력이 느껴지는 법이다. 심지어 나의 사랑 나의 우상 빈센트 반고흐조차도 그의 무자비한 평가를 피해갈 수 없었다.
그림은 알기 위해 그리는 거예요. 아는 것은 그리지 않아요. 이미 아는 것을 그리는 것은 나 이만큼 안다, 라고 잘난척하는 꼴이에요. 정말 알고 싶어서 그리는 것이 그림이죠. 그런 면에서 반고흐는 이미 아는 것을 계속 확인하고 또 확인하기 위해 그렸다는 생각이 들어요. 술자리에서 취하면 간혹 이렇게 말하곤 하죠 .반고흐 개새끼.
단언하지 못하는 사람에겐 적도 존재할 수 없다. 자신의 작업을 똑똑히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만이 타인의 작업에 대해서도 열정적으로 분노할 수 있다. 모든 다양성을 인정하고 상대주의적인 태도로 넓은 포용력을 지닌 사람은 대체로 작가로서 별로인 경우가 많다. 참을성이 많다는 것은 곧 입장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평범보다는 편견이 훨씬 낫다. 비록 나와 의견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홈커밍보이는 말하면서 자주 화난 표정을 지었는데 말로만 떠드는 술자리 예술가의 같잖은 허세인지는 지켜볼 일이다.
어느덧 세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어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그림을 구경했다. 섣부른 판단일지는 모르겠으나 홈커밍보이의 시선을 기대했던 나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그건 자코메티가 그린 그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