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에게 블록체인의 가치가 뭐냐 고 묻는다면?
손에 손 잡고 휘다니는 이 강력한 블록 꼬꼬마들은 많은 장점과 강점을 갖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별히 나를 사로잡는 가치를 단 하나 꼽으라면 그건 그들이 여기저기 뿌려 놓고 가는 탈중앙(decentralized) 의 가치라 하겠다. 오늘날까지 흘러 온 시간 속에서 언제나 서로 다른 온도로 해체와 수렴 사이를 왔다 갔다 하던 ’힘’이 이제 충분히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한 사람 한 사람 손에 쥐어짐으로써 각자는 근 몇년 이래 가장 ‘개인’으로서 실존할 수 있게 되어가고 있는 그런 역사의 획기적 한 구간에 우리가 막 들어섰다. Zcash, Monero, PIVX 등등 익명성이 강화된 암호화폐들까지 파생되는 판이니 이는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계에서 실존 그 이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
내가 태어난 땅에서 가까운 과거, 진정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아나키즘은 어떤 모습일 것인가를 몸소 보여 주고 가신 우당 이회영, 휴먼-아나키스트로 생을 마치 박열 열사와 가네코 후미코 등에 대한 나의 꺼지지 않는 오마주와 함께, 그보다 더 가까운 과거에 정치학도들 사이에서 나를 이상주의자라고 근본없는 흉 잡히게 만들었던 아니키스트 정신의 불꽃이 오랫동안 어두웠던 가슴 속을 다시 조금씩 환하게 밝혀가는 중이다.
내가 오늘 얘기하려던 크립토 아나키즘(Crypto-anarchism) 은 (관습적인 인식과는 달리) 정치 용어가 아니다. 사우스 웨일즈 대학의 Usman Chohan의 정의를 빌려와 볼까.
크립토 아나키스트들이란 자신의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주권을 전파하고 그들의 프라이버시를 지켜나감에 있어 외부 압력에서 자유롭기 위하여 암호화 소프트웨어들과 프라이버시 강화 기술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즉, 쉽게 말해 아나키즘이 사이버 공간에 등장하고 실현된다는 아이디어이다. 각자 스스로를 탈중앙화시켜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흐름이다. 그것이 결국에는 자신 뿐 아니라 다수의 개개인을 보호하게 될 힘이란 걸 이해하는 사람들의 흐름이다.
뭐, 물론 크립토 아나키즘이 정치 용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치와 무관한 건 아니란 걸 구분 잘 하도록 하자. 정치의 정의를 행정주의에서 벗어나 좀더 근본적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면 말이다. 공동체원 모두가 만족스런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대형 피자 한 판을 가장 합리적으로 잘라 나눠주고 싶었던 정치가 결국은 잘 지켜주지 못 해왔던 우리들의 삶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중재하기 위해 한 데 모은 힘은 결국 소수의 만인에 대한 지배로 변하였고, 특히 개인들의 정보가 소수에게 활용되면서 현실은 점점 더 벗어날 수 없는 족쇄가 된다. 중앙화의 무서움, 그런데 이게 무서운 줄 모르는 이가 많은 게 더 문제이다. 가깝고 쉬운 예를 들어 IBM 멜트다운 사태, 페이스북 개인정보 유출 사태 같은 사건들에서 당국들은 개인들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 아무것도 “못” 하지. 이 무능감이 블록체인 시스템의 윤활유가 되어 중앙에 계신 분들이 높고 강건히 쌓아 올려 온 성의 벽돌을 하나씩 미끌려 빼뜨리고, 성 아래 사람들은 자기 벽돌을 찾아 가져가서 알아서 관리하면 된다. 어느 게 누구 건지만 온 동네가 다 공유하면 됨.
크립토 아나키즘 개념이 최근에 생긴 건 아닌데, 그럼에도 블록체인의 성장 덕분에 그 실체를 점점 더 뚜렷이 느낄 수 있게 되고 있다. 유토피아를 꿈꾸는 건 절대 결코 아니다, 있지도 않고. 그냥 다들 비슷하게 안전하고, 다들 그럭저럭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나 괜찮아" 사회로 진입할 수 있는 키, 내겐 블록체인이 그래서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