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Confession of a Buddhist Atheist.
저자. 스티븐 배철러.
저자 스티븐 배철러가 영국 사람에다가 승려 출신이라는 게 매우 흥미롭게 느껴졌다. 영국이라면 역사적으로 기독교 국가라서 기독교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터인데 어째서 불교 무신론자가 되었을까 궁금해졌다.
스티븐 배철러가 왜, 어떻게 불교의 승려가 되었는지, 이후 환속해서 전 세계에서 불교철학과 명상을 가르치며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지 살짝 들여다 보면서 벽안의 외국인이 불교 무신론자로서 사는 삶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불교'라고하는 종교는 무엇일까? '부처라는 神'을 모시고 회계하여 극락왕생하기를 기도하는 종교일까? 일반 사람들은 그리 아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특히 유일신을 믿는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들도 신을 섬기기 때문에 불교 또한 신이나 우상을 숭배한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불교는 신을 믿는 것이 아니다. 불교에 대해 객관적인 기준으로 알아보고 싶다면 어쩌면 환생과 윤회에 의문을 가지고 환속을 결정한 파란 눈의 서양인 '스티븐 배철러'가 쓴 <어느 불교무신론자의 고백>을 추천하고 싶다.
스티븐은 1974년 티베트 불교를 통해 승려가 되었고, 1981년 한국 송광사에서 선불교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1984년 한국에서의 겨울을 마지막으로 환속하여 재가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한국에서 인연을 맺었던 프랑스인 비구니 마르틴(법명:성일)과 결혼한다.
책은 저자 스티븐이 출가하기 전 히피에서 승려로, 다시 환속하여 재가불자로, 그리고 수행자로서 자신의 여정을 기록해가며 재구성한 역사적 붓다의 삶을 그린 것이다.
무신론자로서 내가 느꼈던 불교에 대한 내 생각과 저자의 생각이 많은 부분에 닮아 있었다. 요즘은 염불엔 관심없고 잿밥에만 관심많은 땡중들도 많아서 현대인들이 점점 더 종교적으로 기댈 곳이 사라지고 있다. 모두가 법정스님 같기를 바라는 건 욕심일지는 모르겠다.
서구 출신의 한 청년이 불교 공부와 수행을 하면서 불교 교리 중 받아들이기 힘든 것들을 놓고 고민했던 모습들은 우리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하겠다. 아니, 정치판을 기웃거리거나 돈독이 오른 배부른 땡중들은 꼭 읽어야 할 책이 아닐까 싶다.
저자가 대한민국 송광사에서 3년 여간 수행했을 때의 이야기가 나온다. 구산 스님을 스승으로 선 수행을 하면서 티베트 불교에서 느끼지 못했던 갈증을 상당히 해소 하였음을 엿볼 수 있었다.
글을 통해 나는 서서히 불교의 '권위자'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 결과 나는 종교간 세미나, BBC 라디오 패널 토론, 요즘의 시급한 문제에 불교적 시각을 필요로 하는 기타 언론 해사 등에 자주 초대 받았다. 일반적으로 나는 기독교 목사, 유대교 랍비, 이슬람교 이맘, 힌두교 스와미와 한 테이블에 빙 둘러앉곤 했다. 일단 서두의 진부한 이야기가 끝나면 토론은 거의 변함없이 신의 언어로 변한다. 그러면 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나는 신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두툼한 신학 서적들을 많이 읽었지만 아직도 그다지 더 현명해지지는 않았다. 신은 모든 것의 원천이자 근거라고 제시된다.
똑같은 종류의 아주 다루기 힘든 신학적 문제들이 인도의 종교사상에서도 나타난다. 박식한 현자와 신비주의자들은, 알 수 없고 하나이며 초월적인 브라흐만 - 즉, 신 -이 어떻게 이 알 수 있고 아주 잘 구별되며 완전히 구체적인 세계가 생기게 할 수 있는지 설명하려고 수세기 동안 애를 썼다.
어느 날 바셋티라는 젊은 브라만이 고타마를 보러 갔다. "이것이 유일하게 바른 길입니다." 그가 선언했다. "브라만 폭카라사티가 가르쳤듯이, 그 길을 따르는 자로 하여금 브라흐마와의 합일에 이르게 하는 구원의 길입니다!" 고타마는 브라흐마를 직접 대면한 적이 있는 브라만이 있냐고 물었다. 신은 보이지 않고 알 수 없으므로 바셋타는 이렇게 대답해야만 했다.
"아니오."
고타마는, 그렇다면 브라흐마와 합일에 이르는 길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게 분명하다고 반박했다.
"맹인들이 서로 붙어서 줄을 지어 가고 있는데, 첫 번째 사람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중간에 있는 사람도 이무것도 보지 못하고, 마지막에 있는 이도 아무것도 보지 못하듯이 이 브라만인들의 말도 이와 같습니다. 그들의 말은 우스우며, 단지 공허하고 헛된 말에 불과합니다." 그런 다음 고타마는 열정적으로 신을 믿는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를 사랑한다고 선언하지만 그녀가 어떻게 생겼냐는 질문에 한 번도 그녀를 본 적이 없다고 인정해야만 하는 사람에 비유했다
고타마가 유행자 우다인에게 무슨 교리를 따르고 있냐고 질문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의 교리는 '이것이 완벽한 훌륭함이다. 이것이 완벽한 훌륭함이다!'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완벽한 훌륭함이란 무엇인가? 우다인?"
붓다가 물었다.
"그 훌륭함은 그 어떤 더 높고 숭고한 훌륭함에도 뒤지지 않는 완벽한 훌륭함입니다." 라고 우다인이 대답했다.
고타마가 그게 무슨 뜻인지 분명히 하라고 요구할 때마다 우다인은 그저 자신의 주장에 또 다른 최상급의 말을 갖다 붙일 뿐이었다.
"우다인" 고타마가 말했다.
"당신은 이런 식으로 아주 오랫동안 계속 할 수 있을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붓다는 "네 가지 위대한 요소 - 흙, 물, 불, 공기 -가 남는 것 없이 그치는 곳이 어디인가?라는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싶었던 어떤 승려의 이야기를 했다.
하급 신들로부터 답을 얻지 못한 승려는 가장 위대한 신, 브라흐마를 보러 갔다. 질문을 볃자 브라흐마가 대답했다.
"승려여, 나는 브라흐마, 위대한 브라흐마, 정복자, 정복되지 않은 자, 모든 것을 보는 자, 전능한 자, 주, 생성자이며 창조자, 지배자, 임명자이며 명령자, 지금까지 있었고 앞으로도 있게 될 모든 이의 아버지이다."
승려가 말했다.
"하지만 제가 질문한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브라흐마는 승려의 팔을 잡아 옆으로 데리고 갔다.
"이봐" 그가 말했다.
"내가 보좌하는 신들은 내가 모르는 것은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 앞에서 말하지 않았다. 승려여, 나는 그 네 가지 위대한 요소들이 어디서 남는 것 없이 그치는지 알지 못한다."
이처럼 경전에서 고타마가 명백하게 신의 문제를 다룬 몇몇 경우에서 그는 아이러니한 무신론자(ironic atheist)로 그려진다. 신의 거부가 그의 가르침의 주축을 이루지는 않으며, 그것을 두고 흥분하지도 않았다.
고타마가 유신론자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반-유신론자도 아니었다. '신'은 단지 그의 어휘의 일부분이 아니었다. 그는 무신론이라는 용어가 문자 그대로 뜻하는 의미에서 '무신론자'였다.
나에게 불교는 행동과 책임의 철학이 되었다. 그것은 내가 삶에서 길을 만들어내고, 사람으로서 내 자신을 규정하고, 행동하고, 위험을 감수하고, 사물을 다른 식으로 상상하고, 예술을 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가치, 생각, 실천의 틀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