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가 더위와의 싸움이었던 폭염을 보내고 가을의 문턱에 섰습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에어컨 바람의 건조함 때문에 더농부 사무실의 식물 식구들도 힘들었던 계절이었는데요. 출퇴근길의 바람이 시원해지고 햇빛도 적당하게 돌아오자 새로운 식물을 키우고 싶어졌습니다. 사무실에는 고무나무나 스투키처럼 공기정화용 화분만 많을 뿐 꽃을 피운 적은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꽃화분을 사야겠다고 결심하자마자 근처 다있는 마트로 향했습니다. 해바라기부터 토마토까지 다양한 미니화분이 많아 뭘 사야할지 고민하고 있던 그때 봉선화가 보였습니다. 첫눈이 올 때까지 봉선화 물이 손톱에 남아 있으면 첫사랑이 이뤄진다는 낭만적인 속설이 떠올랐습니다. 봉선화는 떡잎부터 꽃이 피기까지 두 달 정도가 걸린다고 합니다. 9월에 심으면 첫눈이 내리는 11월 정도에 꽃을 수확할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이 생겼습니다. 봉선화 꽃물은 한 번도 들여본 적이 없어 더 기대가 됩니다. 절대 첫사랑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화분을 사자마자 든 생각 : 아 빨리 분갈이 해줘야겠다. 화분이 무척 작습니다 @더농부
발아 자체가 7~10일로 오래 걸려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심기로 결정했습니다. 구성품도 간단합니다.
지난 버섯 키우기가 버거운 난이도였던지라, 흙을 넣고 씨앗을 심고 물만 주면 되는 봉선화가 꽤 쉬워보였습니다. 하지만 씨앗이 다섯 개인 것에 당황한 것도 사실입니다. 어렸을 때 봉선화에 매달린 씨주머니 하나를 터뜨려도 다섯 개보단 많았던 것 같은데, 과연 저 중에서 몇 개나 싹을 틔울까요.
다 흘린 거 실화냐... 다 주워서 화분에 넣었습니다 걱정 마세요! @더농부
흙을 붓고 씨앗을 심을 차례입니다. 작다고 생각했는데 흙이 꽤 많이 들어가는 화분이었습니다. 혼자 심고 혼자 찍으려니 실수가 있었지만 그런 적 없는 것처럼 말끔히 해결했습니다. 씨앗을 너무 깊이 심으면 나중에 싹이 올라오지 못할까봐 위에 흙을 살짝 덮고 물을 줬습니다. 꽃을 피울 때 물 주기가 가장 어려운 것 같습니다. 흙이 적당히 마르면 주라는 의견이 가장 많은데, '적당히'란 어느 정도일까요? 키우면서 배우는 가드닝입니다.
겨우 햇빛 드는 곳을 찾아 숭아(화분 이름)의 자리를 잡아주었습니다. @더농부
분명 심는 날까지는 햇빛이 쨍쨍해 봉선화 프로젝트가 순항하는 듯 했으나, 문제는 다음 날이었습니다. 태풍 '솔릭'부터 서울의 기록적 폭우까지 일주일 동안 해가 뜨지 않는 날이 이어지며 애를 태웠습니다. 나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마음으로 체념하며 열흘을 기다린 순간!
떡잎이 나왔어요(야호)
심은지 아흐레가 되던 8월 29일, 드디어 떡잎이 보였습니다. 두 개뿐이었지만 이게 어디인가 싶은 생각과, 기다린 끝에 결국 났으니 나머지 씨앗도 차례차례 올라올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들었습니다. 줄기가 올라오면 분갈이를 해주려고 합니다. 화분이 너무 작아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는 떡잎을 넘어 본잎이 나오기만을 바라봐야겠죠. 몇 개나 나올지 기대가 됩니다.
날이 갈수록 봉숭아는 하나씩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둘만 나도 감사하게 키워야겠다는 마음이 무색하게 심었던 씨앗 모두가 발아했습니다. 분명 심을 때는 다섯 알밖에 없었는데 왜 떡잎은 여섯 개나 올라왔는지는 미스테리입니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9월 7일 봉숭아 여섯 식구가 모두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틀에서 사흘 간격으로 물을 주며 시켜봤습니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자라는 모습이 신기합니다. 이쯤부터 어떤 화분에 분갈이를 해줘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마땅한 새 집을 찾아 사무실을 헤매는 하이에나가 되었죠.
각각 나흘과 열나흘이 흐른 모습입니다. 꽤 많이 자랐죠? 떡잎에서 본잎으로 넘어오려는 봉숭아들을 보니 점점 화분이 작아 보입니다. 키만 멀대같이 크고 잎은 아직 그대로라 이대로 분갈이를 하면 뿌리가 너무 약할까 걱정입니다. 딜레마였습니다. 뿌리가 자라려면 큰 화분으로 옮겨심어야 할 텐데, 되려 뿌리가 약해 옮겨심다 죽을 판이니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컸습니다. 어렸을 때 본 봉숭아들은 줄기가 꽤 튼튼했고 잎도 컸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렇게 계속 두면 곧 11월이 옵니다. 추워서 꽃도 못 피우고 죽기 전에 빨리 조치를 취해야 했습니다.
기억 속 봉숭아... 사무실 애들이랑은 좀 다른데... @게티이미지뱅크
그러던 중 추석이라는 장기 휴일이 왔고 봉숭아와 정 인턴의 희비는 갈렸죠. 마지막 퇴근 전에 물을 충분히 주긴 했지만, 통풍이 전혀 안 되는 사무실에서 물과 양분 없이 일주일을 버틴 봉숭아 육 남매는 쇠약해졌습니다. 의도치 않은 방치를 하게 돼 미안한 마음에 더욱 열심히 돌봤습니다만... 과하게 적은 흙과 작은 화분 때문에 더이상 크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더 크면 이사 가자! 를 그렇게 외쳤으나 봉숭아와의 기싸움에서 사람이 지고 말았습니다. 본잎 하나만 제대로 나면 바로 분갈이를 해주려고 했지만 10월 초가 되도록 감감무소식인 봉숭아를 위해 화분 이사를 가기로 결정합니다.
그때부터였을까요? 봉숭아가 망한 게...
점심시간을 활용해 분갈이를 하려고 우선 화분 앞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봉숭아를 바라봤습니다. 흙부터 꺼내야 할 것 같아 화분을 뒤집었습니다. 또 바라봅니다. 분갈이는 어떻게 하는 걸까... 가드닝 고수들의 글을 많이 찾아봤지만 정작 눈앞에 화분이 있으니 머리가 하얘집니다. 결국 SOS를 청합니다.
각자 하나씩 식물을 맡아 기르고 있는 더농부 사무실의 인턴 중에서도 가드닝 일인자가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김 인턴입니다. 흙을 들고 뿌리 분리 - 라고 말하고 파괴라고 쓰는 - 를 위해 노력하는 동기를 도와주러 왔습니다.
더농부 공식 식물마스터 그녀 @더농부
신기하게도 정말 세심하게 살살 털어내니 마구 엉켜있던 뿌리가 하나씩 풀리기 시작합니다. 졸지에 포토그래퍼로 포지션이 바뀌어 옆에서 열심히 지켜봤습니다. 위로 하도 조금 자라서 뿌리도 짧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꽤 길고 수염도 많습니다. 각각 분리한 줄기들을 땅에 심을 차례입니다. 작년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도통 열매를 맺을 생각은 없는 들깨 옆으로 자리를 정했습니다.
뿌~듯 @더농부
일정한 간격을 두고 구덩이를 팝니다. 그 안에 봉숭아를 한 줄기씩 넣고 혼자 힘으로 설 수 있을 만큼 흙을 덮었습니다. 물을 주고 위에 버릴 예정이었던 버섯 배지를 거름으로 줬습니다. 버섯 농장에서도 이를 숙성시켜 거름으로 쓴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들깨 집으로 쓰였던 이 흙은 벌써 일 년이 넘어 양분이라곤 없기 때문에 뭐라도 줘야 봉숭아가 살아날 것 같았습니다. 마성의 손 김 인턴의 도움을 받아 분갈이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그랬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용의자 1 김 인턴과의 대화 @더농부
월요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청천벽력 같은 봉숭아 실종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부랴부랴 보러 가니 잎이 누렇게 뜬 봉숭아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다 쓰러져 허덕이는 상태였죠. 흙이 촉촉한 걸로 봐선 목이 마른 것도 아니고 나름 거름도 줬는데 뭐가 문제였을까요. 얇디 얇은 줄기가 잎을 지탱하지 못하고 바닥으로 고꾸라집니다. 지금까지 어떻게 키웠는데! 분갈이 하나 했다고 이렇게 한방에 저세상으로 가버린 봉숭아가 밉습니다.
얘들아 정신차려... 이렇게 가면 안되는 거잖아... @더농부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일주일을 더 지켜본 결과 봉숭아는 말끔히 사라졌습니다. 누가 마법이라도 부렸나 봅니다. 아직도 인턴들은 봉숭아가 왜 죽었는지 이유를 모릅니다. 다만 멀리 떠나가버린 봉숭아를 추억할 뿐입니다. 이 기사는 봉숭아의 생애를 담은 전기이자 추모글이 돼버렸습니다. 11월에 꽃을 따서 손톱에 들이고자 하는 꿈은 말 그대로 야무진 장래희망이 되어 땅 속에 같이 묻혔습니다. 나름대로 이 친구들이 왜 삶을 포기했는지 분석해봅니다.
묻을 걱정 없이 자연 속으로 회귀했네요 하하 @더농부
왜 죽었을까 원통하다 봉숭아여
CASE 1. 분갈이를 너무 일찍 했다?
사실 흙을 엎고 뿌리 상태를 봤을 때 너무 얇아서 놀랐습니다. 이 줄기가 제 힘으로 설 수 있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분갈이 직후에는 잘 서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주말이 지나자 바로 땅과 밀착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봉숭아를 키우는 다른 이들의 글을 보니 저 정도로 잎이 없는 상태에서 화분을 교체한 경우는 없는 듯합니다. 여섯 줄기가 모조리 다 성한 잎을 틔우기에 맨 처음 공간이 애초에 너무 작았습니다. 처음부터 분갈이를 고려해 씨앗 자체를 한두 개만 심었다면 이렇게 급하게 죽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또, 분갈이를 할 때 뿌리에 이전 흙이 어느 정도 묻어 있어야 한다는 의견과 그럴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갈립니다. 원래 흙의 양이 적었기에 대부분 털고 새로 심었는데, 그래서 더욱 힘이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CASE 2. 흙 자체가 잘못됐다?
봉숭아를 심은 화분에는 무려 정 인턴이 입사하기 일 년쯤 전 구매한 배양토가 가득했습니다. 흙이 담겨있던 봉투의 설명에는 '한 달쯤 지나면 안에 있는 양분이 떨어지니 별도의 영양제를 공급하라'는 말이 쓰여 있었죠. 하지만 그 안에서 들깨를 키웠고, 그 들깨가 꽃은 미처 피우지 못했어도 잊혀질 때마다 한번씩 사무실 식구들에게 깻잎을 선물하곤 했으니 땅이 그렇게까지 척박한 줄은 몰랐습니다. 물론 거름이 없다는 사실 자체는 알고 있었기에 버섯 배지를 부숴 뿌려주었지만 이 부분도 잘한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자료조사를 한 결과 폐배지는 영양분과 균사, 톱밥이 촉촉하게 뭉쳐진 덩어리라 거름으로 많이 쓰이긴 합니다. 하나 건너뛴 과정이 거름의 발효였습니다. 사무실에서 냄새를 풍기며 배지를 썩힐 순 없으니 그대로 땅 위에 올려뒀던 것이 실수였을까요? 뭐든지 다 있다는 잡화점에 가서 식물 영양제라도 하나 샀으면 좋았을 뻔했습니다.
CASE 3. 사무실 환경이 별로다?
언제나 그렇듯 건조한 사무실에 이제는 히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봉숭아를 살리자고 사람이 얼 순 없는 일이니까요. 추워서 창문을 닫아 통풍이 안 되는 것도 마른 공기를 만드는 데 한몫했습니다. 햇빛도 아침 두어 시간을 빼곤 거의 들지 않습니다. 이런 실내에서 꽃을 피우겠다고 했으니 봉숭아가 얼마나 고생했을까요. 미안한 마음이 큽니다.
다음 타겟은 누구? (씨익)
사무실 농부 타이틀을 줄 다음 타겟은 누가 될까요? 덧붙여 봉숭아의 사망 이유에 대해 정확히 진단해주실 가드닝 고수님들의 댓글을 바랍니다. 똥손과 곰손이 모인 더농부 사무실 식물들의 랜선 의사가 되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