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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thewriter 님 덕분에 알게 된 Katie Melua 의 I will be there 을 수없이 듣는다. 내내 이곡만 듣는데 벌써 200번쯤 듣지 않았을까 싶다. 뭐에 꽂히면 그것만 한다, 질릴 때까지. 좋아하던 것을 그렇게 하나, 둘 잃어버리는 게 싫어 나중에는 좋아하는 것과 일부러 거리를 두기도 했다. 음악이든, 음식이든, 일이든, 사람이든.
멍청한 짓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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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에 꽂히면 그것만 즐기는 것과는 별개로, 익숙한 것을 더 선호하는 경향도 있다. 새로운 것에 호기심을 느끼고 다양한 시도를 하기야 하지만, 이미 잘 알거나 좋아하는 쪽을 더 많이 찾게 된다. 음악도, 음식도, 일도, 사람도. 그게 편하고 자연스러운 데다 선택의 실패에서 안전하다. 마음이 늙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지금이나 그때나, 처음은 늘 어렵거나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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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0년 전까지만 해도, 1년에 한두번씩 마음에 불안이 엄습할 때가 있었다. 익숙한 나의 집과 부모님을 떠나 외박을 할 경우에 특히 그랬다. 친척 집에서 자거나 엠티를 가서, 누구보다 신나게 잘 놀고 있다가도 별안간 여긴 어디며, 이사람들은 다 누구냐는 끔찍하고 낯선 느낌에 얼른 그곳으로부터 도망쳐, 내 방 이불 속에 숨어 들어가고 싶었다. 가끔은 엄마 배 속으로 피신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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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증상은 연애를 하면서 사라졌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낼 수 있는, 나의 바닥까지 껴안아 주는 ‘타인’ 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안정을 찾은 것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사랑’ 이 제일이라고 말하고 다니나 보다. 이런 안식처가 누군가에겐 가족, 친구, 반려동물... 나아가서는 종교나 직업, 책이나 음악, 일기장이 될 수도 있겠지. 의미나 역할이 다를 뿐, 내게도 모두 중요하다. @eternalight 님 말마따나 결국 뿌리는 다 ‘사랑’ 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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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런 꽁냥거리는 이야기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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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박 5일동안 또 집을 떠나게 되었다. 큰이모, 이모부를 모시고 일본 홋카이도에 간다. 물론 나는 여행갈 돈이 없고, 여행 플래너 겸 통역 겸 가이드로 가는 것이다. 영국인들과 서울, 부산을 돌아다닌 것이 엊그제같은데 이번에는 일본이다. 두분 모두 연세가 일흔이 넘으셨고, 이모는 무릎이 안좋으셔서 10분을 걷는 것도 힘드신데 꼭 자유여행을 하고 싶으시단다. 나는 장롱면허라 차를 렌트하지도 못한다. 1인 24만원 주고 왕복 비행기표를 샀는데, 어제보니 13만원짜리가 나왔다. 급 스트레스에 나도 모르게 곯아 떨어져 약속시간에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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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에는 아빠와 동생과 설악산에 간다. 우리나라 국립공원에선 비박(침낭/텐트 숙박등) 이 불법이라 국립공원 내 대피소나 야영장을 이용해야하는데, 등산객에 비해 자리가 턱없이 부족해 온라인으로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 국립공원 홈페이지에서 한달에 두번 예약을 받는데 개시를 하자마자 5초도 안돼서 마감이 되기때문에 학창시절, 수강신청을 실패해본 적 없는 (대신 학점 실패...) 내가 대피소 예약을 맡았다. 서버 알람이 10시를 알리고 F5에 고정한 왼손 중지와 예약을 원하는 달력 날짜에 고정시킨 마우스 커서를 번갯불처럼 움직여 소청대피소 성인 3명을 예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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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정상을 오르는 것은 마지막이 되지 않겠느냐고 아빠가 말씀하시며 무릎이 부쩍 좋지 않아 걱정이 된다고 하셨다. 나도 최근(스팀잇을 시작하며) 체력이 급격히 저하되어 걱정이 되지만, 산행이 오랜만이라 설렌다고 거들었다. 나는 산에 올라가는 게 꿈같아. 엄마가 아이처럼 해맑게 말씀하셨다. 예기치 못한 순간이었다. 엄마는 같이 안가시는데... 하는 생각에 철렁했는데, 말그대로 꿈같다는 말씀이었다는 걸 알고도 마음이 시큰했다. 세 부녀가 설악산에 갈 동안 엄마는 집에 계신다. 큰이모가 엄마를 위해 인천으로 와 계실 것이다. 그러면 된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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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엄마에게 연민을 느낀 적이 없었다. 엄마가 안타깝지도, 딱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엄마를 돌보시는 아빠가 늘 안쓰러웠고 내 자신이 불쌍했다. 엄마는 되려 원망의 대상이 되고는 했다. ‘엄마 때문에 우리집이’, ‘엄마 때문에 내가’..... 살아나줘서 고맙고 고맙던 엄마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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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나빠 안경이나 렌즈를 사용하는데, 안경을 쓰면 눈이 한참은 작아진다. 세상 똑똑한데 세상 모자라 보이는 (더욱) 곤란한 외관을 형성한다. 하필 어제 렌즈가 똑 떨어졌다. 안경을 쓰고 외출하는 것은 내게 고무장갑을 끼고 외출하는 것처럼 어색하고 달갑지 않은 일이지만, 별 수가 없어 교회에 안경을 쓰고 가야했다. 전에 살이 10kg 가 쪄서 한국에 왔을 때도 누가 보면 ‘우리 딸 건강미 넘치지 않느냐’ 며 선수를 치시던 팔 굽은 아버지도 어제만큼은 왜 안경을 썼느냐 고 물어오셨다. 무슨 뜻인지 알면서 벗으면 앞이 안보여서요. 라고 대답했더니 더는 말씀이 없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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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사고가 있기 전에 부모님은 왕성한 교회활동을 하셔서 덩달아 딸인 나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는데, 엄마가 기적처럼 살아나신 뒤로는 더욱 주목을 받아 내 입장이 난처하기 짝이 없다. 나는 교회에선 둘째가라면 서러운 아웃사이더이기 때문이다. 학창시절엔 특히나 교회와 일부 기독교 신자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고, 중등부나 고등부에 적응하지도 못했다. 누군가 먼저 다가오면 ‘왜 친한척?’ 하는 송곳같은 마음이 앞섰다. 목회자나 교회 선생님들에게도 까칠했다. 교회에서 나는 그냥 날선 표정으로 아무말도 안하는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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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은 엄마 곁에서 예배를 보니, 부모님과 인사를 나누는 교인들을 모른척하고 앉아 있기가 어렵다. 결국에는 도장을 찍듯이 웃고 인사한다. 수영장은 안경을 벗으면 끝이지만 (수영장의 슈퍼스타★ 참고) 교회에서는 지켜드려야 할 두분의 명예와 체면이 있기에. 그런 게 더 싫어 일부러 행실과 행색을 함부로 했던 학창시절의 아웃사이더 기질이 한풀 꺾이는 순간이었다. 교회 안내와 헌금을 맡은 아빠의 뒷모습이, 애써 찬송을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은혜롭고 사랑스러웠다. ‘사랑의 시작은 측은함’ 이라는 내용의 설교가 있던 어버이 주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