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코 냉장고를 열었다가 그대로 멈춰 섰다. 냉장고를 오래 열어두면 에너지 손실도 크지만 안에 보관한 식재료가 신선도를 잃기도 하기 때문에, 냉장고 청소를 하는 것이 아닌 이상에야 문을 8초 이상 열어두는 법이 없었다.
아빠가 코스트코에 쥬스를 사러 가신다더니 Naked 라는 과일쥬스를 사오신 모양이다. 그 중에서도 녹색채소와 과일을 스무디처럼 갈아만든 것인데 하필이면 6에서 7년 전, 내가 제일 치열하게 살았을 적에 레드불, 커피와 함께 가장 자주 마시던 음료다. 냉장고를 열어 만난 그 익숙한 로고와 탁하고 꼬릿한 풀색나는 음료와 예기치 않게 재회한 순간, 이미 뉴포트에서 허드슨강 너머 뉴욕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어디선가 불어 오는 찬 바람이 뺨을 할퀴고 간다.
나에겐 얼마나 사치스러운 쥬스였던가. 통장잔고가 마이너스였을 때 잔돈을 모아 스몰사이즈 한병을 사서 하루 끼니를 떼우곤 했다. 해외에 살 때 이런적이 꼭 한번씩은 있다. 도쿄에 있었을 때는 침대 밑에 떨어진 동전까지 싹싹 모아 집앞 자판기에서 300엔짜리 토마토 쥬스로 삼시 세끼를 대신한 적도 있었다. 물배를 채우는 것이 오래갈 것 같은데 건강은 생각해야겠고 해서, 그러고보면 꼭 묵직한 과일쥬스를 먹었다.
그렇다고 동정하기엔 이르다. 얼마 안 가 돈 쓸 시간도 없이 일한 덕분에 막판에는 모아둔 돈을 흥청망청 쓰다가 정작 한국에 돌아오는 비행기표 값이 없어 낭패를 보기도 했으니까. 벼락부자가 이래서 망하는구나 싶었다.
그래도 한 때는, 카트를 한가득 채운 다른 손님들 틈에서 차례를 기다리다 겨우 달랑 하나 계산하고 나온 그 Naked 쥬스가, 대용량짜리(크기가 내가 먹던 것의 20배는 되어 보인다) 로 한국 냉장고에 떡하니 있는 것을 보니 순간 출세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그 반대였으면 반대였는데도.
잠에서 깨자마자 ‘오늘은 뭘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팀잇에 글을 쓰고 싶은 생각도 사실은 들지 않았다. 여전히 내 글따위로 남의 귀한 시간을 빼앗는다는 미안함이 들고, 이제는 글을 쓰는 목적과 의미도 달라져 버렸다. 나 역시 내 피같은 시간을 이 곳에 빼앗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무서운 생각도 든다. 나같은 피래미가.
친구들에게 만나자고 연락이 와도, 매번 서울 가는 것이 힘들고 이젠 밥값도 부담스럽다. 서울 왕복 버스값만 6천원이 넘는다. 이젠 니들이 송도로 오라고 하고 싶지만 나만 빼고 다 서울에 살고, 아이가 있거나 직장인들이니.. 결국 인천에 사는 싱글 백수가 움직이는 게 나를 제외한 모두를 위한 것이다. 대신 밥을 사준다고 하면 마치 내가 밥을 얻어 먹으려고 만난 것 같은 기분에 극구 돈을 내게 된다.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Adele 의 Rolling in the deep 이 흘러 나온다. 2011년 겨울, 새벽같이 나가거나 새벽이 되어서 돌아오던 출퇴근길에 매일같이 들었던 곡이다. 뭐 하나에 꽂히면 지겨울 때까지 하는 미련한 버릇이 있어, 결국 이 노래도 이후 몇 년이나 듣지 못했다.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어둡게 눈 내린 길을 뽀득뽀득 걷다가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지하철에 몸을 맡긴다.
오늘 하루 벌써 두 번이나 강제로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하고 왔다. 그러고보면 얼마 전에 발견한 일기도... 결국엔 다 그때다. 우연이겠지만, 신경이 쓰인다. 자꾸만 누가 ‘너 지금 뭐하고 있니?’ 하며 나를 흔들어 깨우는 것 같다. 알람소리를 못들은 것인가.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