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서 도망간 적이 있었다.
여러가지 말로 내 행동을 합리화했지만 난 알고 있었다. 결국 현실에서 도망간 것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당시 내 상황은 좋지 않았다. 꼬일대로 꼬여버린 일들은 출구가 보이지 않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다. 아내는 임신 중이었고 집안은 이런저런 일로 시끄러웠다. 무엇보다도 난 지쳐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면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통의 시기를 참으로 힘겹게도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다 난 결심했다. 이 모든 것을 정리하기로..
아내를 비롯한 내 주변 사람들은 날 말렸다. 그들은 한결같이 아무리 힘들어도 이렇게 끝내는 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난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난 사업에서 손을 떼겠다고 선언하고 일방적인 정리 작업에 들어갔다. 그렇게 내 첫 사업도전은 막을 내렸다.
그렇게 해서 일단 몸은 편해졌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내 마음 속에서부터 어떤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계속해서 이 결정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이 소리는 커져만 갔다. 난 괴로웠다.
그때 밤에 어디를 다녀오다 차에서 라디오를 틀었는데 우리 승환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른이 되어 간 사이
현실과 마주쳤을 때
도망치지 않으려 피해가지 않으려
내 안에 숨지 않게 나에게 속지 않게
그런 나이어 왔는지
나에게 물어본다'
나에게 물어본다.. 나에게 물어본다..
그때 처음 알았다. 이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를.. 여러가지 말로 내 행동을 합리화하고 그럴싸한 논리를 갖다 붙여 변호를 해도 내 스스로를 속일 수는 없었다. 난 갖길에 차를 대놓고 한참 동안 뼈아픈 눈물을 흘렸다.
늘 그렇듯 현실은 부조리하고 미래는 불확실하다. 사람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고 동기도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의 결정을 판단한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설령 그 결정이 잘못된 것이 명백하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일이 아닌 이상 왈가왈부 나서서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본인 스스로는 알고 있다. 그 결정이 정당한 것이었는지를..
그리고 이것이 현실로부터 도망가는 것이었을 때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비난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크고 엄중하다.
누구에게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그런 현실을 살다 보면 누구나 도망가고 싶어질 때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명심할 것은 그런다고 모든 게 정리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고통스러운 현실은 피한다고 피해지는 것이 아니다. 현실의 모든 것은 충분한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정리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기 스스로에게 떳떳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치러야 할 대가를 회피하고 도망갔을 때 난 항상 마음이 무거웠다. 진실로 무서운 것은 나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책망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나의 비겁함에 대해 엄히 꾸짖고 있었다. 귀를 닫고 듣지 않으려 해도 너무나 선명하게 들려오는 소리였다.
나의 첫번째 사업 실패의 여파는 생각보다 컸고 오래 갔다. 계속해서 이어진 자책의 시간은 이후 내가 현실을 사는 과정에서 다른 자세를 갖게 만들었다.
첫째, 선택을 할 때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둘째, 일단 선택을 하고 어떤 일에 발을 들여놓았을 경우 내가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면 온몸으로 치른다. 그 과정이 끝날 때까지는 움직이지 않는다.
이것을 실천에 옮겼을 때 솔직히 몸은 힘들었다. 그러나 내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었다. 꽤 힘든 시간을 지나야 하는 일도 있었지만 참고 헤쳐나갔다. 이때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사람에게는 놀라운 적응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죽을 것 같이 힘들었지만 난 곧 그 상황에 적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시간을 견뎌내고 나니 사람들은 날 인정해주었다.
승환옹은 말한다.
이 모든 것이 불행해지지 않기 위한 거라고..
'부조리한 현실과 불확실한 미래에
내 안에 숨지 않게 나에게 속지 않게
그런 나이어왔는지 나에게 물어본다
부끄럽지 않도록 불행하지 않도록
더 늦지 않도록..'
난 깨달았다.
진정 불행한 것은 현실과 맞설 용기가 없는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