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사진은 일제강점기 때 지은 산업 물류 창고
1930년 대저동 일대 대홍수 때 창고 2층으로 주민 대피.
피난 수도 부산은 " 유네스코(후보)에 잠정등록"이 되었습니다.
제가 사는 대저동에도 그 때의 아픔과 진한 형제애가 남아 있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위사진에 보이는 건물은 일제 시대 [1930년 이전]때 지은 건물로서
증언에 의하면 원래는 총 6개 동으로 지어졌는데 5개동은 사라지고
지금은 1개동만 남아 있습니다. 일본 산업 조합 창고로 사용되다가
해방 후 농협에서 관리를 했다고 합니다.
1933년 낙동강 대홍수 때 창고 2층으로 대피를 했다는 증언도 있네요.
이 건물이 6.25 때 중요한 피란의 장소가 되기도 했는데 지금부터 그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1950년 7월 낙동강 전투가 치열해질 무렵 경남 함안 군북면도 그
전투를 피해 갈 수 없었죠. 미군의 대대적인 폭격이 예상되는 바
군북면의 두 마을 동촌리 신창 마을 덕대리 덕촌 마을.350 가구 주민들이 미군들에 의해서 피란을 내려 왔다고 합니다. 마산을 거쳐서 김해로 그리고 다시 대저면으로... 그 때 당시 현 대상초는 국군이 그리고 현 낙동중학교에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기에 군북면의 피란민들은 사진의 건물 농협 창고 6개동에서 피란 생활을 시작 했다고 합니다.
5개 동의 창고는 2층짜리도 있었고 규모가 큰 건물이 있어서 천여명의 피난민들이
불편하나마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서연정 동연정 상리부락 세 마을 주민들 집집마다 피란민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어
함께 생활할 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원주민들도 전쟁통이라 힘든 시기였음에도 니꺼내꺼 가리지않고 피란민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었다는 증언을 들었을 때 실로 놀라지 않을수가 없었습니다]
체육공원역 앞으로 흐르는 수로를 통하여 생활 용수를 사용했었고
[대지 양수장에서 서낙동강 물을 끌어 당겨서 수로에 공급했음]
창고가 서연정 부락에 있었기에 서연정 부락 주민들은 물론이고 동연정 상리 부락 주민들이 또한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전해집니다. 인민군이 밀려난 후 수개월 뒤에 군북면 관계자분들이 와서 감사의 인사를 했었다는 미담도 남아 있고요..
피란 생활을 약 두달에서 석 달 정도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증언을 군북면 면사무소에 근무하시는 분을 통하여 간접 증언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외 나머지 이야기는 저희 부친께서 해 주셨습니다.
제가 우연한 기회에 도시재생센터 일을 하면서 이런 미담을 추적하게 되었는데요.
아름다운 미담이 더 존속되지 않고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게 된 점은 너무나 아쉽네요.
늦었지만 완전히 잊히기 전에 두 마을간의 연결 고리를 이어 볼 까 합니다.
알려지지 않은 아픔도 있기에 그 당시 생존해 계시는 분이 아직 있다면 그 때의 기억을
복원하는 작업도 해야 하는게 후대의 의무가 아닌가 싶네요
남은 한 동의 건물도 언제 철거될지 몰라서 불안한데
완전히 사라지기전에 서둘러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