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명촌 곁다리 여행기 1-맹개의 농부

sanha8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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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명촌을 찾아서 - 맹개마을의 농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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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명촌>이라는 브랜드가 있다. 먹을거리들의 기본이 되는 농수산물들과 그를 바탕으로 만든 장, 젓갈, 식초 기타 등등 기타 등등의 ‘명인’(名人)과 그들의 터전인 ‘명촌’(名村)을 발굴하고 그들과 제휴하여 명인과 명촌의 기를 받은 명품들을 상품화하는 것을 사업의 영역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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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회로 이 명인명촌의 대표님과 인연을 맺게 된 바, 하루는 귀가 번쩍 뜨이는 얘기를 듣게 됐다. “농산물도 농산물이지만 농산물을 가지고 만드는 가장 고차원의 음식이 술 아니겠나. 희석식 소주에 맹탕 맥주 타 먹는 폭탄주가 다가 아니잖아. 전국 곳곳에 의지를 가지고, 생을 걸고 명주(名酒)를 만드시는 분들이 꽤 많거든. 내 아는 분들하고 한 번 같이 다녀 보지 않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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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라는 말이 이렇게 현실에서 실현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감히 청할 수 없으되 바위처럼 단단하게 바라는 바가 아니겠는가. 체면 불구 위신 배제 박수를 치며 응할 밖에. 원래 지난 주에 처음 합류 예정이었으나 용두사미가 돼 버린 태풍 솔릭의 공포 때문에 성사되지 않았고 이번 금요일에야 대망의 첫발을 떼게 됐다. 목적지는 경북 안동 맹개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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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이라고는 하지만 동북쪽으로 꽤 치우쳐 봉화와 닿고 지척에 퇴계 이황의 자취가 서린 도산서원과 청량산 자락으로 이어지는 꽤 깊숙한 마을(?)이다. 낙동강 상류가 끌어안듯 굽이쳐 흐르고 인근에는 조선 중기 문신이자 퇴계보다 한 세대쯤 선배였던 농암 이현보의 종택이 근처에 수백 년을 버틴 터, 퇴계 선생도 오르내렸다는 학소대가 내려다보는, 언뜻 봐도 물길 외에는 접근이 어려워 보이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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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마을 뒤에 의문 부호를 붙이는 이유는 이곳의 주민은 주인 박성호씨와 그 가족, 스태프가 전부이기 때문이다. 박성호씨는 독일 유학까지 마친 IT 전문가로 젊은 날을 보냈다. 인터넷이라는 말이 생경할 무렵부터 인터넷 관련 사업을 했고 호텔의 식당을 경영하다가 실패를 맛보는 둥 도시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삶이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재미 있고 관심 있는 일을 하는 건 좋은데 그 일을 돈이 되도록 만드는 과정, 술 먹고 사람들 만나고 입에 발린 소리 하고 하는 그 과정이 몹시 싫어지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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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유치원도 가기 전, 두 살 네 살 아장거리던 즈음, 그는 서울에서만 나고 자란 아내에게 폭탄선언을 한다. “나 땅을 살 거다. 경북 안동이다. 회사 정리하고 거기에서 살 거다.” 아내로서는 이 사람이 무슨 술을 잘못 먹었나 싶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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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남편으로서는 몇 년 동안의 고심이 곪아 터진 토로였고, 일상에 대한 회한으로 끓어올린 마그마의 폭발이었다, 남편은 어이없어 하는 아내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때껏 본 바 없던 남편의 절실함에 아내는 일단 물러섰고 남편은 당시로서는 아무도 돌보지 않고, 관심도 없던 땅, 강물에 포위되고 산으로 막힌 땅을 사서 일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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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아내는 서울을 떠나기 망설였다고 한다. 엉거주춤 서울에 머물러 살던 어느 날 아내는 친구와 만나 신세 한탄 비슷한 대화를 하는데 친구에게 이런 말을 듣는다. “그런데 너는 뭐하려고 서울에 붙어 있으려고 해? 아이들에게 아빠 빼앗아 가면서까지?” 그 말에 아내는 한 대 맞은 것 같았다고 했다. 이미 작심한 사람이 서울로 리턴할 일은 없을 것이고 이미 그걸 인정했다면, 자기가 서울에 늘러붙어 있을 까닭이 무엇인가 말이다. 아내도 짐을 싼다. 맹개마을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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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개마을에서 마주보이는 농암종택의 옛 주인 이현보의 삶을 떠올리게 되는 귀농(歸農)이다. 농암 이현보는 가끔 파직되거나 좌천되는 부침은 있었어도 귀양 한 번 경험하지 않은 순탄한 벼슬살이를 했다. 무려 나이 70대 중반까지. 인생 칠십이 흔치 않던 시절 그만한 팔자도 흔치 않았으리라. 그러나 팔자는 주어지는 게 아니라 사람이 만드는 것, 그가 그렇게 평탄한 삶을 살았던 건 그의 인품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그 나이가 되어 고향에 가겠다는데도 임금과 동료 신하, 선비들은 두 팔을 벌리며 아직은 못간다고 막을 정도였다면 짐작이 가지 않을까. 그러나 이현보는 소매 부여잡는 손들을 뿌리치며 다 훌훌 털어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 온다. 맹개마을을 싸안고 흐르는 낙동강에서 고기잡이를 하며 유유자적 안빈낙도 한 세상 살다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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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에 시름 없으니 어부의 생애로다
일엽편주를 만경파에 띄워 두고
인세(人世- 사람 세상)를 다 잊었거니 날 가는 줄 알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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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이 일흔 넘은 퇴직 관료와 나이 마흔도 안된, 아직 젊음을 깨벗지 못한 초보 농부의 삶은 다를 수 밖에 없었으리라. 맹개마을에 들어온 후 10년, 박성호씨는 일대에 있었다는 목화밭을 가꾸는 이들 외에는 아무도 찾지 않던 땅을, 1년에 3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는 곳으로 변신시켰다. 드넓은 밀밭과 메밀밭은 박성호씨의 손과 발, 그리고 땀으로 가꾸고 바꾼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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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중순에는 대설 내린 듯 시리게 하얀 메밀꽃밭이 펼쳐지고 또 수확철이 되면 가을 논과는 또 다른 느낌의 황금빛 밀밭도 융단처럼 깔린다. 마을(?) 한가운데에는 주인과 나그네들이 먹고 쉬어가는 공간이 마련됐다. 시인 안상학이 근사한 이름도 지어 주었다고 한다. ‘소목화당’ (小木花堂) 예전에 있었다는 목화와 메밀, 그리고 특별히 박성호씨가 마음을 쏟은 밀 모두를 아우르는 이름. 그런데 메밀은 그렇다 치고 왜 밀밭을 만들었을까. 왜 밀에 그런 관심을 가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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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밀밭이 거의 전멸했잖아요. 다 수입 밀이고 거기에는 법적으로 허용은 됐다지만 방부제나 화학 물질들이 엄청나게 섞인 것들이고..... 그래서 농민회 분들과 함께 우리 밀을 살려 보자 하는 마음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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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고 백남기 농민이 쓰러지고 사경을 헤매던 즈음, 그는 서울에 올라가 살았다고 했다. 그를 쓰러뜨린 정권에 분노에서 관련 시위를 뛰어다니며 목청을 돋웠다고 했다. 아마도 ‘우리 밀 살리기’에 함께 했던 백남기 농민에 대한 애틋함이 컸으리라. 고 백남기 농민은 토종 종자인 ‘우리밀’을 살리기 위해 전국을 다니면서 씨앗을 구했고, 24kg에 불과했던 우리밀 씨앗으로 지금은 전국에 2만 헥타르(ha)에 달하는 우리 밀 농지를 구현하는 데 공을 세운 분이 아닌가. 백남기 농민 얘기를 하면서 잠깐 감회에 젖는 그의 옷자락에 노랗게 맺혀 있는 세월호 리본 역시 그가 어떤 마음으로 농사를 짓는지를 엿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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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가 요즘 정성을 쏟고 있는 것이 바로 술이었다. 기본적으로 술을 좋아하고 사업하던 시절 원없이 술을 먹었던 그였다. 하지만 정성들여 지은 농산물 앞에서 그는 또 다른 욕망에 사로잡힌다.

궤짝으로 갖다 놓고 마시던 희석식 소주, 화학 첨가물 때문에 속도 아프고 머리는 깨질 것 같던 막걸리 말고 정말이지 좋은 술, 소믈리에 자격증까지 따 가며 잔뜩 격상시켜 놓은 자신의 입맛에도 걸맞고 땀 쏟아 거둔 값진 밀에도 보답할만한 술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는 그렇게 술 만들기에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다. “제가 뭘 집중하면 좀 깊이 들어가는 편입니다.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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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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