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2월 8일 비날론의 발명가 이승기 사망
이승기 하면 100이면 아흔 두 명은 꽃미남의 대명사이자 “꽃보다 누나”의 시다바리, “누난 내 여자니까”를 부르짖는 달콤한 가수 이승기의 이름을 떠올리겠지만 오늘 말하려는 사람은 그 이승기가 아니다. 그리고 그는 일제 강점기 시절 세계적으로 명망이 있던 조선 사람 중의 하나였다. 일제 36년간 단 12명에 불과했던 이공계열 박사 학위 소지자였고 단 두 명밖에 없는 제국대학 박사 학위 소지자였다. 제대로 된 나라의 과학자로서 적당한 지원을 받고 연구에 몰두했더라면 노벨 화학상 정도는 충분히 꿰찰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가 근무했던 일본 교토 대학에서 노벨 화학상 수상자가 두 명이나 나왔던 점을 기억한다면 더욱 그렇다.
이승기는 1939년 나일론에 이어서 세계 두 번째의 화학섬유라 할 ‘합성 1호’를 발명했다 나일론이 석유를 주 재료로 만든데 반해 이 합성1호는 석탄을 주 재료로 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비록 최초의 타이틀은 놓쳤지만 세계가 조용하지 않을 새로운 합성섬유의 발명이었다. 일본이 이 연구에 주목했던 것은 합성섬유 나일론이 일본의 전통적 수출품인 견사 산업에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당장 이승기는 공학박사에 교토대학 교수로 임용됐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그 이름은 떵떵 울렸고 이승기는 조선 과학의 최고봉으로 떠받들어졌다. 하지만 일본을 탈탈 털어버린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 와중에 연구는 쉽게 진행되지 못했고 실용화 단계에 이르지 못한 채 전쟁이 끝난다.
해방 후 이승기는 귀국했지만 환경은 최악이었다. 공대 학장을 맡긴 했지만 연구를 제대로 할 여건도 상황도 주어지지 않았다. 더욱이 1946년 국대안 파동, 즉 경성사범, 경성 의전 등 학교를 총폐합하여 국립 서울대학교를 만든다는 군정청의 결정이 온 학원을 투쟁의 불길로 몰아넣자 진저리가 난 이승기는 다 때려치우고 고향 전라도 담양으로 내려간다. 그때부터 그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38선 이북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리선생, 남반부에 무엇이 있습니까. 원료가 있습니까 설비가 있습니까. 선생을 이해하고 도와 줄 정부가 있습니까. 이북에는 일제 때 쓰던 공장과 설비와 인력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연구를 모든 걸 걸고 도와 줄 준비가 돼 있습니다.” 이 설득은 솔깃한 것이었고 전쟁이 난 후 이승기는 가족들과 함께 월북을 결행한다. 당시의 남한은 그같은 인력을 붙잡기에는 너무나 천박하고 열악한 사회였다.
그의 합성섬유는 북한에서 만개한다. ‘비날론’이라는 이름도 붙여졌는데 혹설에 다르면 김일성 주석이 직접 붙였다고 한다. 그의 비날론 사랑은 대단했는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비날론 공업은 완전한 우리의 주체적 공업입니다. 그것은 첫째로 비날론을 발명한 것도 조선 사람이고 그것을 생산하는 공장을 설계하고 건설한 것도 조선 사람이기 때문이며, 둘째로 우리나라의 풍부한 원료에 의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승기가 조선 사람인 것이야 말할 것이 없고 그 공장을 설계하고 건설한 것도 이승기일 것이고 비날론의 원료는 석탄과 석회석이었으니 이른바 ‘주체 섬유’로 이만한 것이 없었다. 1961년 함흥에는 연간 5만톤 생산 규모의 비날론 공장이 들어선다. 이 공장 준공을 위해 군관민이 총동원됐고 김일성 주석은 공장 준공일에 등장하여 축배까지 일일이 따라주며 기뻐했다. 한국에서는 1963년에야 나일론을 생산하기 시작했으니 이것 역시 북한이 한 발 앞섰다.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몽양 여운형의 조카이자 역시 유능한 화학자였던 여경구가 반론을 제기했다. “비날론은 경공업 발전에 도움이 안됩니다. 나일론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기실 비날론에는 단점도 많았다. 생산에 대규모 설비가 필요한 것은 그렇다고 치고 전력도 무지하게 잡아먹었고 그것으로 만든 옷도 문제투성이였다.
일단 염색이 안되는 것은 옷감으로서는 치명적이었다. 다 비슷한 색깔의 옷을 입는다면 그건 제복이지 일상복이 아니다. 그러나 여경구의 주장은 무시된다. 주석님이 말씀하신 주체섬유를 버린다는 건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미군 폭격을 당해 중상을 입었을 때 김일성이 차를 보내 구출해 왔을 정도의 인재이던 여경구는 그 후 빛을 보지 못한다.
주체 섬유 비날론에 대한 집착은 계속됐다. 1983년 평안남도 순천에 지어지기 시작한 비날론 공장은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무려 100억 달러가 넘는 손실이 났고 1989년 1차 공사 완료 이후는 진척조차 없었다. 남벌로 인해 처처에 민둥산이 생겨났고 이는 대홍수의 원인이 됐으며 대홍수는 탄광까지 적셔 버렸다. 거기다가 한때 남한까지 공급했던 북한의 전력은 도저히 비날론 공장을 돌릴 수준이 되지 못했다. 그렇게 북한의 세계적인 자랑거리였던 비날론은 북한 몰락의 주요 원인 중의 하나가 되는 비극을 맞이한다. 그래도 북한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몇 년 전 2.8 비날론 공장의 재가동을 요란하게 선전했으나 오늘날도 그 성과는 신통치 않다.
이승기의 과학적 성과는 탁월했으나 거기에 정치가 개입되면서 과학의 장점이라 할 연구를 통한 수정과 반론을 통한 성장이 봉쇄됐다. 영명하신 주석님의 교시가 틀릴 리 없었고 틀리더라도 맞춰야 했고 그에 반대하면 사상적 의심을 감수해야 하는 사회에서 세계 초유라 할 합성섬유는 사상 최악의 아이러니의 모델로 전락한 것이다.
이승기는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면서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겪던 무렵, 1996년 2월 8일 아흔 한 살의 기나긴 생애를 마친다. 돌아가면서 그는 여러 사람의 생각을 했겠지만 아마 두 사람의 얼굴이 가장 크게 지나가지 않았을가 싶다. 하나는 비날론에 반대했던 화학자 여경구. 또 한 명은 이승기와 쌍벽을 이루는 화학자로서 남한에 남아 일가를 이룬 화학자 이태규.
이승기는 이태규를 무척 그리워했다고 전한다. 동독에 있다가 서독으로 망명한 일군의 북한 유학생들은 굳이 이태규를 찾아 스승 이승기의 안부를 전했다고 하는 일화가 남아 있다. 이태규도 다르지 않았다. 북한에서 살다가 탈출한 최은희의 자서전까지 탐독하며 이승기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궁금해 했다는 전언이 그를 말해 준다. 조선의 보배라고까지 일컬어지던 과학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재주를 탐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들의 재주를 올바로 쓰게 한 사람들은 적었다. 한 화학자의 빛나는 업적은 그 업적을 칭찬한 지도자의 실책으로 이어졌고 한 나라의 몰락의 원인 중의 하나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