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3월 19일 아들을 따라간 어머니
1962년 육군 15사단 예하 부대의 한 내무반. 병사들이 희희낙락 뭔가를 보고 있었다. 온몸을 배배 꼬기도 하고 깔깔대고 웃기도 하고 어설프게 낭독하기도 하면서 그들은 누군가의 편지를 읽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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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영(永)! 꿈같은 시간이었어요. 무사히 군대에 들어가셨는지요…우하하하.... 이별은 정말 슬퍼요 우헤헤헤." 그 앞에서 한 일등병이 애타게 소리를 질렀다. "주십시오. 제발! 이러시면 안되잖습니까." 일병에게 온 애인의 편지였다. 하지만 병장과 상병은 어림도 없다는 듯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일등병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고참들은 낯빛을 바꾸었다. "이런 싸가지없는 새끼. 고참한테 뭐가 어째?" 그리고 주먹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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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던 일등병은 입을 다물었다. 며칠 후 일병은 고참들에게 호출당한다. "야 최영오. 너 배짱 좋다. 소원수리하면 네 군 생활 광날 거 같더냐? 야 군대 좋아졌네. 이 개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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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오 일병은 애인한테 오는 편지를 먼저 뜯어보고 대놓고 읽어대는 고참들을 참다못해 상부에 호소했던 것이다. 일병쯤이면 그래도 군대라는 곳을 알았을 텐데, 대한민국 60년대 군대를 너무 인간적으로 보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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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참들은 골난 며느리 강아지 배 걷어차듯이 문제만 생기면 최영오를 갈궜고, 7월 8일에는 사소한 문제로 숫제 곤죽을 만들어 놓는다. 전치 4주에 해당할만큼 두들겨 팬 것이다. 여기서 최영오는 폭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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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개새끼들! 가장 심하게 괴롭혔던 정 병장과 고 상병을 향하여 엠원 소총을 겨눈 것이다. 엠원 총에는 총 8발의 탄창이 들어간다. 그는 총 7발을 쏘아 두 명을 죽이고 한 명에게 부상을 입힌다. 마지막 한 발은 자신을 겨눴지만 옷깃만 스친 채 총알은 빗나갔고 최영오는 자살에 실패하고 체포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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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오는 서울대 문리대 기상학과를 다니다가 군에 입대했다. 그는 ‘학보병’이었다. 학보병이란 대학에 재학하던 중 입대한 병사를 1년6개월 만에 제대시키는 제도였다. 최영오 일병은 제대를 얼마 남겨놓고 있지 않았다. 최영오 일병은 상관 살해 죄명으로 사형을 선고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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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에 가장 까무라친 것은 물론 피해자들의 부모일 것이지만 최영오 일병의 어머니 역시 그 사건을 들은 순간부터 산 사람이 아니었다. 남편과 사별한지 20여년, 아등바등 길러낸 자식이었고 그 노고를 알아주고 뜻을 저버리지 않았던 아들이었다. 그 아들이 군에 입대한 지 1년만에 사형수가 되어 창살 안에서만 마주하게 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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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애끓는 호소에도, 서울대 동문들의 집단 서명이 담긴 탄원서에도 불구하고 두 명의 상관을 총살한 병사에 대한 군법의 지엄함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1963년 3월 18일 오전 최영오 일병의 형은 면회를 가서 동생과 마주한다. 그러나 이미 3일전 국방부장관의 총살 집행 명령이 나 있었던 것은 꿈에도 몰랐다. 그날 오후 최영오의 집에는 3월 19일 오후까지 시신을 찾아가라는 짤막한 전보가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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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수 최영오의 마지막 부탁은 수인번호를 떼 달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옥중수기에 "이 사건이 터진 뒤 육군참모총장은 특별담화를 통해 “사신(私信) 검열은 육군 규정을 어긴 것이며, 사적(私的) 제재를 금지하고 서신의 기밀을 유지함으로써 인권을 옹호하는 데 만전을 기할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 군대 내 하급병사에 대한 반인권적 린치가 총기사고의 배경임을 인정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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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오 일병은 총살형을 당하기 전 옥중수기에 이렇게 썼다. “물론 연서가 살인에 피상적 동기가 된 것은 부인 못한다. 그러나 나로서는 연서 자체 때문에 살인자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 이하의 불의에 항거하였으며, 또 그것을 말살하려고 한 것이다.… 나는 저 인간됨을 죽인 것이 아니라, 인간 이하의 노리개를 갖고 그것을 향락하려는 씹고 싶도록 잔인한 근성을 삭제하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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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오는 가족에 대한 안부와 함께 "군대가 관료주의적인 것으로부터 개인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민주적인 군대 가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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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그날밤 집을 나서 마포 강변쪽을 향했다. 평소 빨래하면서 "저런 데 빠지면 못나와"라고 말하던 곳을 찾은 어머니는 아들 영오가 선물했던 지팡이를 땅에 꽂아 놓고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투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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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에서 어머니를 찾던 가족이 그 절규를 듣고 뛰어갔으나 어머니는 이미 자취가 없었다. 남긴 유서는 아들 대신 내가 죽겠으니 아들을 살려 달라는 호소였다. 1963년 3월 19일로 하루가 넘어가던 늦은 밤 , 한강물은 어머니의 숯같이 하얗게 타버린 한을 머금고 시커멓게 흐르고 있었다. 어머니의 시신을 찾고 있던 아침, 아들은 총구멍 난 시신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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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에 갔다온 사람은 애인의 편지를 고참들이 읽고 있는 걸 보고 눈이 뒤집혀 탄창을 비워 버렸다는 얘기를 들었을 것이다. 유사한 일은 종종 벌어졌고 내 주변에도 비슷한 이유로 사고가 난 적이 있었다. 그때 행해진 정신 교육은 이런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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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고참들이 잘못했다. 하지만 애인 있는 게 죄냐? 생사를 같이할 전우끼리 대범하게 웃어 넘길 수도 있는 문제 아니냐." 최영오가 죽은 지 27년이 지났던 시점의 대한민국 정훈장교의 교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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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오 일병이 소망한 최소한의 개인적 권리가 보장되는 군대는 그가 죽은지 50년이 가까와지는 지금도 백두산만큼 멀다. 종북 앱 '나꼼수'를 누가 깔고 있는지 검사한다고 사병도 아닌 간부들의 휴대폰을 뒤지고 그 꼬라지를 언론사에 제보한 게 누군지 밝혀내겠다고 통화기록을 제출하라고 날뛰는 군대가 "국가와 국민에 충성을 다하는 대한민국 육군"이며 , 20년 전에 출간돼서 멀쩡히 팔리는 역사책을 봤다고 징역을 살리는 군대가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인데 무슨 말을 더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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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군대는 군기가 든 군대가 아니라 왜 싸우는를 알고 자신이 지켜야 하는 가치를 절감하면서 싸우는 군대다. 명색 개인의 존엄과 자유를 수호한다는 대한민국 군대의 자화상이 5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일점 변화없는 모습이라고 하면 우리는 그를 돌덩이라고 불러야 할까 쇳덩이라고 불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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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오 일병은 옥중에서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자신이 죽은 이들이 피를 흘리며 매일 달려들어 견딜 수 없다고 했다. 순한 청년이었다. 그의 손에 죽은 청년들도 타고난 새디스트였다기보다는 좀 짖궂긴 하지만 명랑하고 믿음직한 각자 집안의 아들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을 죽인 것은, 그리고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군대였다. 그들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