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책> '경애의 마음'

sanha8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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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_오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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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마른 대지에 내리는 비 - <경애의 마음>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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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소설을 읽지 않게 됐다. 아내의 지적대로라면 정서가 메마른 탓이다. 예전에는 그래도 소설깨나 읽었고 웬만한 베스트셀러 소설들은 어떻게든 사서 읽곤 했는데 아예 소설을 사는 버릇을 잊어 버렸다. 특히 여성 작가들 소설은 더욱 까마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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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여성 작가들이라 표현하여 이 예민한 시기에 ‘여혐’ 혐의를 받을 마음은 없으나 스토리는 단순한데 그 안의 심리 묘사가 서너 페이지 분량을 차지하는 양상은 내 인내력의 한계를 넘어서기 일쑤였다. 아내는 그 지점을 공격한다. “그러니까 정서가 메말랐지. 사람의 마음 속이 얼마나 깊고 복잡한 건데 그걸 싫다고 하면.... 쯧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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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 등처럼 갈라진 이 메마른 정서를 모면해 보고자 소설 한 권을 집어들었으니 김금희 작가의 소설 <경애의 마음>이다. 제목부터가 ‘마음’이 들어간다. 보다가 잠드는 일이 잦겠구나 내지는 읽다가 그만둬 버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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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다행히 그 예상은 빗나갔다. ‘한 번 책을 넘기니 마지막 페이지까지 단숨에 읽어 버렸다.’고 하면 터무니없는 거짓말이 될 테지만, 그 다음 내용이 궁금하여 틈나는 대로 집어들고, 또 등장인물들 하나 하나에 감정이 흘러들어 마음이 접혔다 펴졌다 하는 느낌을 받는 경험은 꽤 오랜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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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 소설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채 인식하지 못했지만 돌아보니 어디엔가 분명히 있었던 어떤 마음에 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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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을 지내고 방귀깨나 뀌는 아버지에게 상처받은 아들, 그러나 그 빽으로 미싱 만드는 회사에 입사해서 치워 버리고 싶으나 치우기 힘든 낙하산, 계륵 같은 존재로 살아가는 상수, 하지만 페이스북에서는 ‘언니는 죄가 없다’는 연애 상담 페이지를 운영하며 수만 명의 젊은 여성들의 고백과 고충과 투정과 상담을 해 주는 ‘언니’가 또 하나의 그의 정체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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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생들 다 팀장 달 때 팀장대리로 처박혀 있던 상수가 팀장이 됐을 때 팀원으로 받은 경애. 그 회사 파업 때 머리까지 밀어가며 열심히 나섰지만 노조 안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회사와 노조 모두로부터 왕따를 당한 여자다. 옛 애인이자 유부남과의 만남을 오래된 습관의 재생처럼 이어가고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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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외롭다. 그런데 둘의 외로움에는 비슷한 심연이 있다. 그 심연에 선 동일인물. 그는 상수와 경애가 청소년이었을 때, 1999년 동인천 호프집 화재 참사 때 죽었다. 이름은 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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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수는 은총의 친구였고 은총이 만든 단편영화에도 출연(?)했다. 경애는 은총과 영화 동호회에서 이니셜 ‘E'의 이름으로 은총을 만났고 얕지 않은 교감을 나눈다. 고등학교 축제가 끝나고 뒷풀이가 벌어지던, 청소년들에게 버젓이 술을 팔고 불이 나도 돈 내고 나가라고 고함 지르다가 혼자 내빼버린 사악한 주인이 경영하던 그 호프집의 화재 현장에서 ’은총‘이자 ’E‘는 세상을 떠난다. 경애는 잠깐 나간 사이에 화를 모면했고 상수는 그 자리에 오던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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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는 “거기에는 내 마음이 다 담겨 있어.”라며 자신의 영화 <마음>을 소개하면서 자신의 손을 살짝 잡던 E의 죽음을 끝없이 재생되는 영상처럼 기억하고 상수는 친구 은총의 음성사서함에 남겨져 있던 여학생의 목소리로 은총의 흔적을 간직하고 산다. 그런데 둘은 서로를 모른다. 유부남인 옛 애인과의 의미 없는 만남을 지속하던 경애는 자신의 소회를 <언니는 죄가 없다> 페이지에 주구리장창 풀어 놓지만 상수는 자신의 퉁명스러우나 유일한 팀원이 그녀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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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로운 두 사람은 서로를 알지 못한 채 얽혀서 산다. 마치 영화 <접속>의 주인공들처럼.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가 서먹함을 녹여 가는 과정과 비슷한 속도로 서로의 정체(?)에 대해 접근해 간다. 둘 다 외롭지만 서로를 위로해 주지 못하다가, 공간을 달리하여 베트남에 파견돼 나가 세상의 부조리와 부당한 탐욕을 경험하면서 그 간격을 좁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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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했듯 메마르고 황량한 내 정서로는 그들의 미세한 떨림과 감정의 흔들림, 노래 하나 영화 한 편에 심겨져 있는 복선들을 일일이 챙기기가 쉽지 않았고 10년 넘는 터울의 세대 차이(?)가 있어서 전적으로 그 감정선을 따르기는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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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 끈이 돼 준 것은 역시 경애와 상수가 청소년이었을 때 일어났던 동인천 호프집 참사에 대한 공감이었다. 그 참혹한 어른들의 범죄에 타죽고 숨막혀 죽어간 아이들. 그러면서도 “왜 애들이 술을 먹으러 가? 죽을 놈들이 죽은 거지.”하며 사악한 알리바이를 대던 당시 어른들, 그때 “우리 친구들은 불량학생들이 아닙니다.” 호소문을 발표하려던 학생들, 그걸 또 원천봉쇄하라고 아우성치던 ‘교육자들’의 모습이 소설을 넘어 다큐멘터리로 펼쳐졌던 때문이랄까.

또 그 상처를 공유했으나 서로 알지 못하는 외로움들을 넘어서 그 외로운 사람들이 비열한 세상에 맞서 가느다란 연대의 끈을 굵게 불려 나가서 비리와 맞설 용기를 다짐하며 “팀장님 우리는 여기까지 왔어요.” 악수를 나누게 되기까지의 여정, <언니는 죄가 없다> 페이지가 해킹돼 책임론이 대두될 때, 운영진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상수가 남자임을 밝히겠다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계속 속이는 거잖아요. 그러고 싶지는 않아요.”라며 굽힌 어깨 펴고 숙인 고개를 들게 되는가의 흐름이 치밀하고도 섬세하게 내 시선을 끌어간 이유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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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라인’ 이나 ‘밀당’ 같은 건 애초에 관심사항이 아니었고 그런 대목을 읽는 것을 무척 지루해 하는 편이지만 서로의 정체를 완전히 파악한 뒤 소식이 끊기고, 같은 공간에 있지도 못하게 된 상황에서 둘의 조우가 어떻게 이뤄지기까지는 꽤 조마조마하며 읽었다. 어떻게 처리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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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웨이 위 워>의 마지막 장면처럼 결코 무심하지는 않으나 서로 다른 길에 선 사람들의 이별로 마감할까 아니면 영화 <접속>의 ‘Lover's Concerto' 같이 시작하는 연인들의 쑥스러움이 될까. 그런데 그 마지막 장을 읽으면서 나는 싱긋 웃었다. 마음에 들었기도 하고 적절하기도 하다는 동의의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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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간 친구 은총과 그가 남긴 8밀리 테이프를 꺼내 놓고 꽤 스산하게 추운 날 (동인천 호프집 참사도 10월의 마지막 날 어간이었다) 소파에서 잠든 상수. 이 뒤는 소설 그대로를 갖다 놓는 게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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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것이 자신을 덮고 있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는데 담요였다. 그리고 상수는 누군가 들어와 자신의 허락도 받지 않고 커피 포트로 물을 데우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둘러보는 것을...... 그렇게 자신을 뒤로 하고 서 있는 사람의 한편으로 기울어진 고개. 이제는 길어서 포니테일로 묶은 머리카락과 좁은 편의 그 어깨는 상수가 하루에도 몇 번씩 상상해 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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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그들의 가슴 떨림을 공유한다 함은 고목같은 아재의 한심한 개그가 되겠으나 이 장면에서 나는 어떤 음악이 흐르면 좋을지를 가늠하고 있었음을 강변하고자 한다. 빈약한 나의 음악적 소양으로는 도무지 근접한 곡을 발견하지 못하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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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이 책을 읽으시고 “바보야 여기서는 이 곡이지” 하면서 지휘봉으로 어깨를 내려쳐 주시면 고맙겠다. 어떤 음악이 어울릴지 한 번 들어 보고 싶다. 이쯤 되면 메마른 나의 대지에 소나기 한 번 시원하게 내려 준 소설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산하의 오책> '경애의 마음' | Ecenc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