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7월 30일 시키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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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선 학교에서는 교육의 실질적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러자 학부모들도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자식의 장래를 열어주는 유일한 길은 대학에, 그것도 보다 좋은 대학에 보내는 것이라는 생각은 뿌리가 깊다못해 만수산 드렁칡이 되어 있었다. 집을 팔아서라도 자녀를 대학에 그것도 좋은 대학에 보내야겠다는 생각은 일종의 신앙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사교육의 발호는 당연했다. 자신은 밥을더라도 자식의 사교육비는 챙기는 풍조가 일반화되었다. 고액의 스타 강사가 천문학적 수입을 챙겼고 현직 교사들도 그 대열에 끼어들기도 했다. 그런 실력있는 사교육 교사를 구할만한 실력이 안되는 집은 대학생 그룹과외라도 시켜야 직성이 풀렸다. 학생을 둔 집안은 누구나 이 학교 밖의 과외 수업을 외면할 길이 없었다."
위 얘기를 들려 주면 중고생을 기르는 부모들 대다수는 가슴을 치며 한탄할 것이다. "맞아 큰일났어 요즘 세상이.....". 그렇다. 요즘 이야기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70년대 말 대한민국 상황이기도 하다. 당시의 신문 기사를 가져온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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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7월30일 국보위는 교육계의 근간을 바꾸는 교육개혁안을 선포한다. 본고사를 폐지하고 예비고사와 내신만으로 학생을 선발하고 궁극적으로는 내신만 가지고 학생을 선발토록 유도해 나가는 한편,졸업정원제를 실시하는 등 기존의 대학 입학 제도를 혁명적으로 뒤바꿔 놓은 조치였는데 이 개혁안의 가장 큰 핵심은 '과외 금지'였다.
재수생 학원을 제외한 모든 과외가 원칙적으로 금지됐다. 공직자가 과외 교육을 시키다가 발각될 경우는 파면을 감수해야 했다. 기업체 사장이 걸리면 세무조사가 이어졌다. 대학생들의 '몰래바이트'도 적발되면 퇴학 등 중징계를 받았다. 국보위는 과외 놔두면 나라 망친다는 각오로 과외를 잡도리하려 들었다. 이것은 '안보의 문제'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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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피를 입가에 흘리며 "하지 말라면 하지 말란 말이야"라고 으르렁거리는 머리털 없는 괴물의 서슬 앞에서 '과외'란 단어는 얼어붙었고 곧 산산조각났다. 물론 진짜 힘쥔 이들이야 몰래 몰래 다 과외 공부 시켰다는 전설이지만 적어도 4-5년 동안은 보통 사람들의 사이에 사교육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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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중 하나가 전국 각지의 개천에서 나타난 용들이었다. 이름없던 고등학교, 별 볼 일 없는 집안의 이무기들이 전두환의 서슬이 펼쳐 준 경쟁의 장에서 승리를 쟁취한 것이다. 강남 8학군이야 그때에도 유명했지만 내가 속했던 부산진 2학군이라고 해서 별로 열등감을 누릴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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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용들이 부모 세대가 된 즈음 역사는 완전히 환원됐다. 공교육은 70년대 말보다 더 붕괴됐고 사교육의 충직한 수요자와 유눙한 공급자는 거개가 '전두환의 아이들'이다. 특목고 동문은 너무 많아서, 일반고 동문은 너무 적어서, 동문회를 알리며 '필참즉사'를 협박하던 벽보는 캠퍼스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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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목적고는 그 부모의 '특수직업고'가 된지 오래고 전국 각지에 산재했던 개천들은 마르거나 복개됐다. "엄마의 정보력과 아버지의 직업에 더하여 할아버지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농담 앞에서도 왕년의 용들은 제 놀던 개천은 생각도 않고 오로지 한강만 바라보고 새끼 이무기들을 닥달하고 있다.
정조 임금은 과거 제도가 시험 문제 등의 활용을 통해 지방 인재들의 환로를 막고 벌열 가문 자제들을 입신시키는 요식행위로 전락함을 개탄하며 이렇게 말한다. "대체 인재는 남산과 북악산 사이에만 있단 말이냐." 우리는 그 개탄에서 자유로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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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의 7.30 개혁 조치 자체는 기실 지극히 폭력적이었고 많은 부작용을 야기한 실패작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러나 사교육을 한칼에 베어 버리고 시키면 죽는다 복창을 강요하던 그 악짙 조교가 가끔은 생각난다. 자꾸만 생각난다. 심지어. 그 시절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