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학의 시작

sanha8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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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7월 10일 최초의 야학 등장

1907년 7월 10일 마산. 남성동 69번지의 한 창고 건물에서 매우 특이한 이름의 시설 하나가 문을 연다. ‘마산 노동 학교' 마산의 부유한 유지였던 옥기환, 구성전 두 사람이 자금을 출자하고 명도석·김명규·나인한·팽삼진 등 청년지식인들이 교사로 참여하여 탄생한 국내 최초의 노동 야학이었다. 학생들은 전원 선창 어물상의 피고용인을 비롯한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의 자제들이었다. 처음 학생수 20∼30명에 조그만 창고를 교실로 사용하여 개교하였으나 날이 갈수록 학생 수가 증가하였다. 수업연한은 1년이었으며 일본이 세운 공립학교 아이들이 일본 교과서로 일본어를 교육받은 것과는 달리 조선어를 첫째 중요과목으로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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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기환은 자신의 사재로 학교를 운영하며 수업료를 받지 않았고 교재까지 무료로 제공했다. 또 마산의 주요한 민족학교인 창신학교 출신들이 대거 교사로 자임하면서 노동야학은 수백 명 규모의 학생들의 보금자리이자, 3.1운동을 비롯한 항일 의식의 온상이 됐다. 이후 ‘노동’자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일제 당국 때문에 야학은 이름을 바꿔야 했고 마산 노동 야학교는 마산 중앙 야학교로 바뀌었고 이는 오늘날의 마산 중앙중학교와 마산공고의 원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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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현대사에서 ‘야학’이란 그 어떤 단어보다도 아름다운 향기를 발한다. 여건상 조금 먼저 배우고 익힌 이들이, 그 배움을 자신의 성을 쌓는 벽돌로만 이용하지 않고 뒤처진 이들을 끌어올리는 디딤돌로 쓰려고 했던, 즉 “배워서 남 주려고 했던” 사연은 1907년의 오늘로부터 100년 동안 유구하게 빛난다. 생판 낯선 고장 (경기도 안산)을 찾아가 일제 경찰의 방해를 무릅쓰고 아이들과 여성들을 가르치다가 과로와 영양실조로 죽어가면서도 “나는 갈지라도 교습소는 영원히 경영하여 주시오. 우리 애처로운 학생들을 어찌 하나.”하고 안타까와했던 함경도 여성 최용신은 우리 문학의 고전 ‘상록수’의 모델로 영원히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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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에 따라 성격도 바뀌었다.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한 이들을 위한 비제도권 교과 교육의 기능을 넘어서, 빼앗기고 짓밟힌 권리의 소중함을 깨우치는 동시에 자신이 가르치는 이들의 경험과 건강성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고자 하는 젊은이들도 야학의 깃발을 들었다. 그들은 교사와 학생이 아니라 ‘가르치며 배우는’ 강학(講學)과 ‘배우면서 가르치는’ 학강(學講)으로 서로를 규정하며 역시 "배워서 남 주는“ 삶을 실천하고 전파해 나갔다. 그래서일까 어느 야학의 교가로 만들어졌던 노래 <그루터기>의 가사는 언제 불러도 가슴이 덥다. ”...... 대지를 꿰뚫은 깊은 뿌리와 내일을 드리고선 바쁜 의지로 초롱불 밝히는 이 밤 여기에 뜨거운 가슴마다 사랑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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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진 것을 나 자신만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나보다 처진 이 앞에서 우월감 대신 부채감을 가지며,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조차 교만하게 여기며 오히려 자신의 모자람을 채워감을 기쁨으로 삼았던 마음. 지식의 전달 뿐만이 아니라 왜 우리가 이러한 현실에 처해 있는가를 함께 고민하는 자세는 곧 작지만 거대한 ‘연대’의 시작이었다. 그 연대가 가장 뜨겁게 타올랐던 경우의 하나로 '들불 야학'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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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년 7월 5명의 대학생 강사(강학)와 35명의 노동자(학강)로 1기 입학식을 치른 이후 81년 10월 4기 졸업생을 끝으로 막을 내릴 때까지 이곳을 거쳐간 20여명의 학생이자 스승들(강학)과 150여명의 또 하나의 학생이자 스승들(학강)은 광주항쟁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와 정면으로 맞섰던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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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항쟁 기간 유일한 언론이었다 할 투사회보를 만들어낸 것이 그들이었고, 윤상원과 박용준 등 강학을 지냈던 이들이 광주의 마지막 날 도청과 YMCA에서 계엄군에게 죽음을 당했고 그 이후 5명의 들불야학 출신들이 고문 후유증 등으로 줄지어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당시 들불 야학의 강학과 학생들 사이는 "너 죽으면 나도 죽는다"고 할 만큼 강고했다고 한다. 들불 야학의 노래는 그 처절한 믿음의 단면을 투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땀과 눈물 삼켜가면서 뛰어가자. 친구, 사랑하는 친구, 들불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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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학의 역사는 또 하나 불멸의 명곡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야학에서 알게 된 노동자들의 결혼식 축가로 만들어진 노래 '상록수'다. 학교를 안 다녔으니 마땅한 은사도 없고, 교회를 나가지 않으니 알만한 목사님도 없었던 그들이 자신들의 강학 김민기에게 주례를 요청했고 새파란 나이에 주례를 맡게 된 김민기가 고민 끝에 지은 축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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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노래의 3절을 부를 때마다 까닭 없이 목울대가 막힌다. 노래를 부르는 청년 김민기와 그를 들으며 눈물 흘렸을 젊은 노동자들이 3D 영상으로 눈앞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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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니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1907년 7월 10일 경남 마산의 허름한 창고에서 생겨난 노동 야학의 학생들이 이 노래를 알았더라면, 안산 샘골에서 아이들과 부녀자들을 모아놓고 혼신의 힘을 다해 가르치던 최용신 선생이 이 노래를 알았더라면 아마도 그들은 목이 메어서 이 노래의 마지막 소절까지 부르지 못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