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4일 6.25 전야
지구 반대편 남미에서는 월드컵 열기가 한창이었다. 1942년과 46년 월드컵이 2차대전으로 무산된 이후 1950년 월드컵이 축구의 또 하나의 본고장 브라질에서 6월 24일 개최된 것이다. 20만 명을 수용한다는 마라까나 경기장에서는 환호가 드높았고 바야흐로 세계는 평화로운 스포츠 제전에 눈을 돌렸다. (물론 요즘 같지야 않았겠지만) 하지만 이 날은 한국인에게는 이후... 60년이 넘는 트라우마를 낳는 전쟁의 이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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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시작을 48년 4.3 항쟁으로 잡는 사람도 있고 육탄 10용사 사건을 비롯해서 38선 전역에 걸친 국지전은 진행되어 온 마당에 전쟁의 발발일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주장도 있지만 적어도 한반도의 완전한 파국을 가져올 전면전은 1950년 6월 25일 일어났고, 6월 24일은 그 전날이었다. 일이 되려면 넘어져도 만 원짜리 앞에 넘어지고 안되려면 뒤로 넘어져도 비뇨기과에 간다고, 이 날은 참으로 이상한 흐름의 막바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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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전면전의 개시는 누가 뭐래도 북한이다. 아마도 영화 실미도의 설경구가 이정희 의원을 보고, 그녀가 6.25가 남침이냐 북침이냐를 얼버무리는 걸 봤으면 “비겁한 변명입니다.”고 절규하며 총을 허공에 난사해도 좋았을 것이다. 그만큼 공개된 자료들과 증언들은 그를 명백히 입증하고 있다. 그 징후들은 한국군 정보 계통에도 낱낱이 보고되고 있었다.
이미 3월에 인민군 수 개 사단이 38선으로 전진배치됐다. 그 대부분은 중국에서 양도받은, 만주 지역 조선인들로 이뤄졌으며 실전 경험도 뛰어난 사단들이었다. 동시에 전국적으로 징집이 이뤄졌으며 38선 인근 민간인들도 소개됐다. 야크기를 몰고 남쪽으로 넘어온 인민군 조종사도 전면 남침이 준비 중이라고 증언했으며 포로로 잡힌 북한 출신의 빨치산도, 인민군 탈영병도 자신들이 경험한 남침 준비 사실을 소상하게 토로했다. 그리고 6월 24일쯤 되면, 이미 전방의 장교들도 인민군 대포의 포신이 죄다 남쪽으로 향하고 있으며, 인민군 장교들이 지형을 살피고 있는 걸 목격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부대 앞에는 인민군들이 접근했다가 돌아가면서 불길한 한 마디를 남겼다는 기록도 있다, “국방군 동무들 내일 새벽에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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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부대에서는 육군 본부로 연방 보고를 날렸고 정보국에서는 남침 임박 보고서를 채병덕 총장에게 올린다. 하지만 채병덕의 대응은 실로 기이하고 이채로왔다. 채병덕 또한 아니라 한국군만큼이나 정보 라인을 가동하고 있었을 미국의 행동도 황당했다. 미 군사 고문단장은 6월 23일 “한국군 육군 참모 내 장교구락부 개설을 축하하는 칵테일 파티를 제안했던 것이다. 채병덕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고 말이다. 자기들끼리 술 먹는 건 좋은데 채병덕은 ”농번기 일손돕기“를 이유로 6월 24일 정오를 기해 오랫 동안 유지되어 온 경계령까지 해제하고 장병들의 휴가 규제를 푼다. 물론 너무 경계령 기간이 오래 된 측면도 있었지만 전쟁 징후가 농후하고 보고서가 연속부절로 올라오는 판에 그 행동은 사뭇 이상한 것이었다.
김종필 의 젊은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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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 수뇌부와 고급 장성들과 미 군사 고문단들은 부어라 마셔라 파티를 벌인다. 이런 자리가 일찍 파한다면 그건 한국인이 아니다. 진탕 술들이 퍼부어졌고 장군들은 비틀거리면서 잠자리에 든다. 이 운명의 24일 육군 정보국 당직장교가 바로 김종필이었다. 그는 인민군의 심상치않은 움직임을 계속 보고했지만 묵살당했고 불길한 예감을 지우지 못하고 토요일 당직근무를 자청했는데 결국 전쟁의 시작을 최초로 실감한 정보 장교가 된다. 그에 따르면 전쟁을 직감한 것은 동두천 부근에서 터져나온 절규였다. “떨어집니다 막 떨어집니다. 듣도보도 못한 대구경 포탄입니다.” 전면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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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남침이냐 북침이냐의 논쟁은 의미가 전혀 없다. 단 궁금함은 남는다. 1950년 6월 24일 한국군의 방어력을 현저하게 약화시킨 배경은 그야말로 우연만이 겹쳐진 것일까. 7사단 공병대장 최정훈은 6월 25일 결혼식을 이유로 부대를 빠져나온 후 행방불명됐는데 그의 결혼은 사실무근이었다고 한다. 7사단은 공병대장의 부재 속에 탱크 부대의 진격을 효율적으로 저지하지 못했고 결국 서부전선의 붕괴의 주요인이 되는데, 과연 그는 누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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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채병덕의 참모들에까지도 제 5열의 의혹을 던지고 있기도 한데, 국군 내에 제 5열이 남아 있었던 것일까. 그럼 미국은 또 무엇이었을까. 미국이 전쟁 징후 보고가 빗발치는 가운데 한국군 수뇌부를 모아놓고 술 파티나 벌일 만큼 물렁한 나라였을까. 물론 절대강자가 그런 식으로 물렁하게 굴다가 발가락 물리는 일이 역사에 귀한 것은 아니지만.
다시 말하지만 남침이냐 북침이냐의 논쟁은 초저녁에 끝났다. 이정희 의원 식의 변명은 게으름을 넘어 무식의 소산일 뿐이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전쟁에는 의문 부호가 많다. 또 다른 전쟁을 막기 위해서라도 전쟁은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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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소상히 알아야 전쟁을 막을 수 있으며, 전쟁을 통해서 뭔가 이룰 수 있다는 오판의 유령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1950년 6월 24일 기억해야 할 전쟁 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