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9월 7일 권의 귀환
전직 문화관광부 장관님이 주연하셨던 영화 "김의 전쟁"은 권희로(김희로)의 이름과 사연을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각인시켰다. 하지만 성실하게 살아가던 한 재일한국인이 민족 차별에 항의하며 인질극을 벌여 일본을 뒤흔든다는 스토리는 실제와는 좀 다르다.
일본 내의 소수민족이라는 결정적 한계의 영향을 받기는 했겠지만, 권희로는 13살에 소년원에 드나들었고 이복 형제들에게 '악마'로 낙인찍히기도 했던 문제적 인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권희로는 자신의 정책에 항의하는 학부모에게 "이거 세뇌가 됐구만."이라고 뇌까렸던 문화관광부 장관만큼이나 독선적이었고, “찍지 마 XX"라고 성깔을 부린 청와대 문화특보만큼이나 거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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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적어도 그가 조센징을 들먹이는 야꾸자를 죽이고(단순 살인이라는 말도 있음), 인질극을 벌이면서 자신이 경험했던 일본 관헌의 민족차별을 폭로했던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평생 족발 장사를 하면서 일본의 밑바닥 생활을 견뎌왔던 어머니 박득숙씨가 한복을 전달하면서 "일본 경찰한테 죽느니 차라리 자결을 해라. 하지만 다이나마이트로 하지는 마라. 내가 시신이라도 건져야 할 것 아니겠느냐."고 했던 일화도 종종 일본 두 글자에 대침에 찔린 듯이 반응하는 한국인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이는 김희로 석방 서명 운동으로 이어진다. 수만 명의 한국인들이 권희로를 석방 요청 서명지에 이름을 올렸다.
일본으로서도 보통 10년이 넘으면 대충 풀려나는 무기징역수를 30년 넘도록 안고 있는 것도 부담스러웠고 “아무개를 죽인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며, 내놓기라도 하면 야쿠자의 복수 대상이 될 권희로가 골칫거리였다. 가석방 후 한국으로의 추방도 대안 중의 하나였지만 문제는 권희로였다.
그는 완강하게 한국행을 거부했다. 인질극 당시 한복을 입고 죽으라던 어머니도 "한국은 그리워할 조국이지 가서 살 곳이 아니다."는 말을 했었고 권희로 역시 '한국'이라는 단어에 극히 부정적인 인상을 가꾸고 있었다. 결국 여러 사람의 설득과 노력 끝에 일본 정부는 007 작전을 하듯 권희로를 가석방하여 한국행 비행기에 태웠다. 1999년 9월 7일. 그는 자유의 몸이 된다. 단, 일본으로는 돌아올 수 없다는 전제 하에
그는 일종의 민족적 영웅으로 귀환한다. 그러나 그는 뜨거운 환영에 고마워하면서도 그 인사조차 한국어로 하지 못하는 이방인이었다. 한복을 전해 주며 일본 경찰에 죽느니 이 옷을 입고 죽으라 했을망정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상상하지 않았던 어머니처럼, 한국인이라기보다는 차별받는 일본인으로 70년을 산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생판 낯선 한국의 영웅으로 등극했으니 정서적 혼란과 문화적 충격이 오죽했을까. 혼돈속에 그는 극단적으로 망가져 간다. 내연의 꽃집 여주인 (권희로는 부인하지만)의 집에 들어가서 남편을 폭행하고 불을 지른 사건은 그 절정이었다.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자 일본 언론들은 "그러면 그렇지!"하고 무릎을 친다. 그리고 덩달아 한국인들은 “어쩐지.. 좀 이상하더라”하면서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그는 빠르게 지워져 갔다. .
그는 2010년 부산에서 세상을 떴다. 눈빛에는 살기가 넘쳤고 폭력성도 유난했던 그였으나 죽기 얼마 전부터 한없이 부드러운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고국에 돌아와 잘 살다 간다."며 해맑게 웃는 그의 모습은 많지 않았던 주변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고 했다. 평생 그를 감고 돌았던 시한폭탄 같았던 공격성이 해제된 뒤, 그는 정 많고 온화한 노인으로 죽었다.
"그가 일본에서 조선인으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가정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일본 형법 사상 최장기 복역수에서 한국인 영웅으로 급상승했다가 또 다시 바닥을 뚫고 스스로를 내동댕이치는 롤러코스터만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의 동생 미쯔꼬는 북송선을 탔다. 옥중에서 보낸 편지에서 그는 "TV에서 북조선의 실태를 방송할 때마다 혹시라도 미쯔꼬가 나올까하고 자세히 보곤 한다. 그 애들을 보낸 것은 정말로 잘못했다고 후회하고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았어야 했는데...."라고 말하고 있다. 또 하나의 고국으로 돌아간 동생과는 평생 소식조차 주고받지 못했다. 권희로는 화장한 유골의 반은 영도 앞바다에 뿌리고, 반은 일본의 어머니 곁에 합장해 달라고 했지만 그조차 일본에 사는 이복 형제들의 반대에 부딪쳐 난항을 겪어야 했다.
어머니의 유해는 일본, 동생은 북한에 둔 한 ‘자이니찌’(재일교포를 이르는 말) 권희로의 유해는 결국 한국과 일본에 반반씩 묻혔다. 1999년 오늘은 그의 암울한 생애에서 가장 화려하고 눈부신 조명을 받았던 날이었다. 그 빛은 곧 촛불처럼 사라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