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5월 20일 국회 프락치 사건
가끔 역사는 무협지가 아니라는 말을 한다. 무협지처럼 정파와 사파가 나뉘어 대결을 펼치다가 사파들의 교활하고 잔인한 책동을 무릅쓰고 정파가 승리하는 것이 역사가 아니라는 뜻이며, 그렇게 일도양단 정의와 불의를 가려낼 수 없다는 의미이며 역사적 진실이라는 것도 쉽게 확보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서다. 누구를 나쁜 놈으로 낙인찍기는 쉽고 역사적 진실의 기치를 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단 그 근거를 확보하고 반론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만만치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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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5월 20일. '프락치'라는 러시아어 단어는 당시 한국 2천만 인구 모두에게 친숙한 단어로 부상한다. 전설적인 사상 검사 오제도를 위시한 검찰이 남로당 지령을 받아 외국군 철수촉구 건의안과 남북통일협상안을 제출한 혐의로 국회의원 6명을 구속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추후 이 혐의자들은 13명으로 불어난다. 이른바 국회 프락치 사건이다.
야릇한 것은 이들이 대개 반민특위 관계자 출신이거나 그를 열렬히 지지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이었고, 그들을 열심히 뒤쫓았던 공안당국의 일원들 즉 헌병사령관 전봉덕, 시경국장 김태선, 사찰과장 최운하 등은 반민특위로부터 친일파 혐의를 받았으면서 동시에 이승만으로부터는 무한한 총애를 받은 인물들이라는 사실이다.
당시 국회부의장 김약수
이 사건의 가장 중요한 증거(?)는 이른바 특수공작원이라는 정재한이라는 여자에게서 나온다. 이 국회 프락치 의원들을 배후 조종(?)한 남로당원의 애인이었다는 이 여자는 그 음부 속에 암호문을 넣어서 월북하다가 체포됐다고 한다. 그런데 이 여자는 프락치 사건 재판 과정 내내 증인으로 호출되지만 재판정에 등장하지 않았고 한창 재판이 진행되던 그 해 겨울에 덜커덕 사형을 당한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것이다. 이 정재한이라는 여자는 얼마나 덩치가 컸던지 그 음부에 “3월분 국회 공작 보고, 유엔한위에 진언서를 제출하는 투쟁보고서'를 비롯해 '암호해표' 등은 분량이 꽤 많아서 약 40∼50쪽에 달하는 장문의 문건” (국회프락치 사건의 재발견, 김정기) 을 감추고 다니는 괴력을 발휘했던 바, 재판 과정을 지켜본 미 대사관 직원 그리고리 헨더슨은 이 정재한이라는 여자 자체의 존재를 의심했다고 한다.
그레고리 헨더슨과 그의 책
정재한이 누구인지 대체 그녀 얼굴이나 보자는 증인 신청에도 그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오제도는 후일에도 이렇게 말하며 코웃음을 친다. “이미 증거가 있는데 증인이 무슨 필요가 있나.” 정재한이 체포된 뒤 문제의 증거를 발견하는 과정은 담당 경찰관의 ‘수사일기’에 기록된 바 그를 그대로 옮겨 보면 이렇다.
“......남의 유부녀의 속곳까지 벗겨 보았다는 죄로 인책사임할 것을 각오하고ㅡ최후의 수단으로 치마를 벗으라고 하였다...... 鄭은 한참이나 어물어물하드니, 하는 수 없이 치마를 벗어 책상 위에다 놓는다. 치마를 책상 위에 놓으려고 허리를 굽힐 때, 어디선지 부스럭하고 종이소리가 났다...... 나는 모든 인간적인 도덕적 양심을 버리고 속바지까지 벗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때서야 鄭은 발을 꼼짝못하고 목석같이 말조차 못하고 서있을 따름이었다.”
여기서 성실한 경찰의 집념이 느껴지는지 여자에게 내 앞에서 당신 발가벗어! 하는 일본 경찰 비슷한 변태성이 휘어감는지 아닌지는 각자의 이데올로기에 맡긴다. 나로서는 이 직후 그가 했다는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우리가 손을 대고 꺼낼 때까지 그러질 말고, 어서 당신 손으로 꺼내는 것이 어떠하십니까?” 부스럭 종이 소리를 들었다면 이 사명감 투철하면서도 경우 없는 경찰이 “당신이 꺼내시는 것이 어떠하십니까?” 따위의 말을 했을 리는 없다는 게 나의 상식적 판단이다. 아니면 말짱 다 소설이던가.
이 유일한 증거를 통해 재판이 진행되던 즈음,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는 6.6 사건이 일어났고 백범 김구가 안두희의 총에 맞는다. 이승만은 하나 하나 자신의 정적을 제거해 가며 권좌를 굳히고 있었고 국회 프락치로 몰린 13명은 꼼짝없이 징역형들을 선고받는다.
이들은 서울 함락 때 후퇴하는 국군과 경찰의 총알을 요행히 피하고 살아남는데 1명을 빼놓고는 다 월북한다. 어떤 이는 그것이 프락치였다는 증거가 아니냐고 하지만 자신을 감옥에 가두고 생명의 위협을 가한 나라에 문제의 국회의원들이그대로 남았어야 했다는 어거지일 뿐일 게다. 남한에 남았던 유일한 국회의원 서용길의 부인은 남편을 수사했던 서울시경 사찰과장의 아들이 찾아와 큰절을 올리며 아버지의 잘못을 대신 사과한 기억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서용길은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려고 노력하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뜬다.
이렇게 두고 보면 언젠가 박원순 서울 시장이 변호사 시절 얘기한 것처럼 국회 프락치 사건은 하나의 조작 사건이라고 추정해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 정황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온 유력한 증인이 있었다. 그건 해괴하게도 북한이었다.
1997년 6월 25일 북한은 성시백이라는 이름의 거물 간첩을 “민족의 령수를 받들어 용감하게 싸운 통일혁명렬사”라고 찬양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국회 안에서 민족적 감정과 반미의식을 가지고 있는 국회의원들로 진지를 구축하고 국회 부의장과 수십명의 국회의원을 포섭하는 데 성공하으로써 외군 철퇴요청과 평화통일안을 발표케 함으로써 미제와 남조선괴뢰도당들을 수세와 궁지에 몰아 넣었다,”는 것이다. 즉 국회 프락치 사건은 북한의 '영웅 1호‘ 성시백의 공작의 결과라는 것이었다. 물론 영웅이 필요한 북한이 해당 사건에 성시백의 활동을 과장되이 끼워맞췄을지도 모르지만.
진실의 핵심은 성시백이 쥐고 있었겠으나 그도 그 진실을 밝힐 기회를 갖지 못한다. 프락치 사건이 일어난지 360일 후, 즉 1950년 5월 15일 체포됐고 한 달 뒤 전쟁을 맞았고 프락치 혐의 의원들과는 달리 서울 함락 직전 총을 맞고 저승으로 떠났던 것이다. 우리의 분단은 전쟁으로 폭발했고 전쟁 속에서 철벽이 됐다. 그 와중에 있었던 수많은 막전막후의 일들은 지금도 비밀에 싸여 있다. 통일돼서 북쪽의 비밀자료가 공개되면 모를까 (나라 꼴을 보면 그런 걸 간직하고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분단의 한쪽이 “우리가 구축한 스파이망”이라고 자인하는 마당에 마냥 사실이 아니라고 우기기는 찝찝한 일이 된 것이다.
국회 프락치 의원들의 최후도 그렇게 평온하지 못했다. 김원봉의 인척이며 그와 함께 약산(若山)과 약수(若水)의 호를 나눠 가졌던 김약수는 월북 후 김일성의 통치에 맞서다가 숙청되어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나머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끔 궁금하다. 1949년 5월 20일 프락치로 발표된 국회의원들은 과연 프락치였을까. 우리 현대사에는 X파일이 너무나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