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 7월 29일 양화진 외인 공동묘지
모든 대도시가 그렇긴 하겠으나 인구 천만의 대도시 서울에는 참 갈 곳이 많다. 골백번 골천번 지나던 대로에서 조금만 골목으로 들어가 보면 전혀 새로운 공간이 나타나고 뜻밖의 장소와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양화대교 북단에 이르면 마주하게 되는 양화진 외국인 묘지의 팻말은 무수히 보았으되 그 팻말을 따라 들어가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허기사 그래봐야 공동묘지일 뿐인데 따로이 가 볼 필요가 없다 싶기도 하다. 그러나 사람이든 장소든 뻔하게 보이다가도 가끔 새로운 모습에 가슴이 일렁일 때가 있는 법이다. 양화진 외인 공동묘지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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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 외인 공동묘지는 해거름쯤 해서 가면 좋다. 길어지는 그림자로 묘비 위를 덮으면서 묘비에 적힌 사람들의 이름과 사연들을 가늠하는 재미도 있고 어둠의 스산함과 낮의 화사함의 경계에서 묘지들 사이를 지나는 느낌이 각별하다고나 할까. 전우용 선생의 <우리 역사는 깊다>에 보면 이 외국인 묘지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재미있게 얘기해 주고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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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론이라는 선교사가 있었다. 의사이기도 했던 그는 테네시 주 의과대학에서 개교 이래 최고 점수로 졸업한 능력자였다. 학교에 남아 후진을 양성하자는 학교 측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는 태평양 건너 은자의 왕국 한국으로 왔다. 비슷한 목적으로 왔다가 후일 미국 공사까지 하는 알렌을 도와 일하던 그는 젊은 나이에 그만 이질에 걸려 쓰러지고 말았다. “조선을 더 사랑하고 싶었는데....”라고 안타까워하던 그는 병원에서 함께 일하던 조선인 친구들을 불러모아놓고 자신이 믿는 복음을 설득한 뒤 그가 믿는 천국으로 갔다. 서울에 들어온 외국인 중 첫 사망자였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조선 정부에 도성 근처에 헤론이 묻힐 공간을 요구한다. 조선 조정으로서는 천만뜻밖의 일이었다. 객사(客死)도 모자라설랑 죽어서도 자기네 나라에 돌아가지 않고 여기에 묻히겠다고? 쟤네 후손들은 성묘 같은 것도 안하나? 그리고 정히 묻으려면 외국인들 이 몇 명 묻혀 있는 제물포로 가면 되지. 어딜 도성에 사람을 묻어. 조선 정부는 모르쇠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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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삼복 더위에 시신을 제물포까지 끌고 갈 수도 없었던 선교사들은 정히 그러면 헤론이 살던 집 뒤뜰에 매장하겠다고 나섰다. 그러자 함께 있던 조선 사람들부터 난리가 났다. “무슨 무덤을 집 뒤에 써요? 큰일난다고요! 다 맞아죽을 수도 있습니다. 도성 안에서는 무덤 못쓴다니까.” 선교사들은 헤론을 방부처리해서 관에 넣어 둔 채 조선 조정을 다그친다. “그럼 우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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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조선 조정이 제공한 땅이 오늘날의 양화진이었다. 그러고보니 그 땅은 외국인들과도 인연이 있는 듯 했다. 천주교인들이 처형된 절두산이 지척에 있었고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거슬러 올라왔던 곳이었다. 조선 정부는 1890년 7월 29일 헤론을 양화진 근처에 묻는 것을 허락하고 일대 땅을 구입해 묘지 영역을 설정하게 된다. 양화진 외국인 묘지의 시작이었다.
이후 많은 서양인들이 이곳에 묻혔다. 그 자신 영국의 핍박을 받던 아일랜드 출신이라 그랬는지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을 사랑했다고 할 만큼 열렬히 반일 신문을 발행했던 베델도 그렇고 대한제국 애국가를 만들고 그 후 3대가 한국을 떠나지 않은 에케르트 일가도 여기에 안식처를 구하고 있으며 배재학당의 아펜젤러나 크리스마스 씰을 처음 만들었던 홀, 언더우드나 아펜젤러 등 친숙한 이름들이 묘비들에 깊숙이 새겨져 있다. 그 중 개인적으로 눈에 띄는 이름은 호미 헐버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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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선교사 겸 육영공원 (최초의 근대적 공립 교육 기관) 강사로 조선에 왔던 그는 그 어떤 조선인들 못지 않게 조선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의 주도 하에 순한글로 된 첫 교과서라 할 “사민필지”가 나온다. 161페이지로 된 이 세계 지리 교과서의 서문은 “중국 글인 한문으로는 모든 사람이 빨리 알지 못하고 널리 볼 수 없으며 조선 언문은 본국 글일뿐더러 선비와 백성과 남녀가 널리 보고 알기 쉬우니 슬프다! 조선 언문이 중국 글자에 비해 크게 요긴하건만 사람들이 요긴한 줄도 알지 아니하고 오히려 업신여기니 어찌 안타깝지 아니하리오”라며 한글의 요긴함을 강력히 주장한다. 헐버트의 솜씨였다. “한글이 영어보다 낫다.”고까지 얘기하며 한 띄어쓰기 아이디어를 처음으로 제기했던 이였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는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사랑했고 누구보다 자신의 제자들을 인재로 길러내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 가운데 누구보다 머리 회전이 빠르고 영리하며 스폰지같이 지식을 흡수하던 애제자가 있었다. 하지만 헐버트는 몇 년 뒤 그 제자에게 욕설에 가까운 비난을 퍼붓게 된다. 그 제자의 이름은 이완용이었다.
아리랑이라는 민요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것도 헐버트였고 민비가 처참하게 죽은 뒤 공포에 떠는 고종의 머리맡에서 권총을 들고 불침번을 선 것도 그였으며 헤이그 밀사의 배후이자 또 다른 밀사로 활약한 것도 그였고 고종 황제가 자신의 비자금을 찾아 달라고 부탁한 것도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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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사랑한 죄로 일제에 의해 한국에서 추방된 그는 해방 후 나이 여든을 넘은 몸으로 그는 한국에 돌아가기를 희망한다. 대체 한국이란 그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감회를 묻는 기자에게 헐버트는 유언같은 한 마디를 남긴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느니 한국 땅에 묻히길 바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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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의 부탁을 해결하기 위해 한국으로 왔으나 이미 세월은 많이 흘러 있었고 무엇보다 헐버트 자신이 기력이 다해 있었다. 그는 1949년 7월 29일, 즉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선교사 헤론이 처음 묻힌지 꼭 59년 되는 날 한국에 돌아온다. 하지만 1주일 뒤 8월 5일 기관지염으로 숨지고 말았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소중했던 땅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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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쓴 <대한제국멸망사>의 서문을 읽으며 그가 얼마나 한국인들에 공감했고 그 비극에 안타까워했는지를 백분이 일이나마 짐작할 수 있으리라. “지금은 자신의 역사가 종말을 고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지만 장차 이 민족의 정신이 어둠에서 깨어날때 '잠이란 죽음의 가상(假像)이기는 하나' 죽음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대한제국 국민에게 이 책을 드립니다" 즉 그는 비록 한국인들이 지금 잠들어 있으나 결코 죽은 것이 아니고 언젠가는 깨어 일어나 스스로의 가치와 생존을 입증할 것이라는 예언이자 희망을 토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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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양화진에 누워 있는 외국인들을 생각한다. 편협한 신앙과 우월에 휩싸인 서양인들도 부지기수였지만 어느 한국 사람보다도 한국을 아끼고 사랑했던 이들도 많았다. 헐버트는 과연 오늘날 우리를 보고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문득 눈살이 찡그려진다. 아마 그도 마냥 미소를 짓지는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