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샘국어를 추억하며, 서한샘 선생의 명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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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아버지는 스크린 너머에서 보던 배우들이 늙고 죽어가는 걸 보면서 세월이 간다는걸 느낀다고 하신 적이 있다. 공감한다. 엊그젠가에는 영화 스타워즈에서 츄바카를 연기한 배우가 돌아갔다는 뉴스가 떴다. 언감생심 그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 없었지만, 그가 연기한 츄바카의 기억과, 그 츄바카가 죽었다는 감회가 연결돼 오묘한 기분에 젖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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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배우 뿐이랴. 직접적인 교분이 없었더라도, 우리 삶에 깊이 들어와 있던 유명인사들, 즉 그는 나를 모르지만 나는 그를 잘 아는 이름들, 얼굴들이 스러질 때 우리는 인생무상과 세월유수를 절감하고 나도 언젠가는 그들처럼 역사라는 밤하늘의 흔적없는 별똥별로 사라져 가겠구나 하고 중얼거리게 되는 것이다. 오늘은 그런 소식이 둘이나 있었다. 바로 서한샘 선생과 유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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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샘 선생의 부음을 먼저 들었다. 듣자마자 앞에 있는 팀원들에게 물었다. 나랑 띠동갑인 차장과 열 한 살 아래 차장. “서한샘 선생을 아나?” 둘은 금시초문이라는 듯 되물었다. 누구에요? 한샘키친 사장이에요? 아. 당신들은 모르는구나. 서한샘이라는 이름을 아는 것으로 나는 또 한 번 아재임을 입증하는 것이로구나. 나는 그를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으나 그 목소리는 지금도 귀에서 끄집어낼 수 있을 듯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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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샘국어의 저자였던 그는 오디오 강의도 했고 그 테이프는 내 국어 공부의 동앗줄이요 구명정이었다. ‘밑줄 좍’과 ‘돼지꼬리 땡야’를 부르짖는 그의 목소리로 나는 용비어천가와 관동별곡을 익혔고 음절과 어절을 구분할 줄 알게 됐고 존칭보조어간과 활음조 현상을 가늠하게 됐다. 학력고사에서 꽤 높은 점수를 얻어 대학에 턱걸이하게 해 준 은인이시기도 하다. 그런데 미안하게도 그분은 나 때문에 언젠가 우리 아버지한테 욕을 장하게 얻어 드신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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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처럼 그분의 강의를 듣고 있는데 그분이 잠깐 옆으로 새는 말씀을 하셨다. “힘들죠? 잠 오죠? 뭐 4당 5락 네 시간 자면 붙고 다섯 시간 자면 떨어진다고 하는데요. 꼭 그런 건 아닙니다. 몸이 정히 피곤하다 싶으면 차라리 깨끗하게 자세요. 꾸벅꾸벅 졸다 공부하다 하면 더 피곤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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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건 복음이었다. 지금도 잠을 이기지 못하는 체질이거니와 한창 때인 그때는 만년필 펜촉에라도 머리가 닿으면 잠들던 시절이었다. 무슨 단파방송 듣는 간첩마냥 한밤중에 카세트 테이프 앞에 두고 뭔가를 열심히 적으면서도 내리꽂히는 눈꺼풀을 들어올리느라 발악을 하고 있던 내게 “잠 오면 자라. 그게 낫다.”는 말씀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복음만큼이나 은혜롭고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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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강의를 들은 후 다른 과목을 더 공부할 생각이었고 실제로 그럴 생각이었으나 나는 서한샘 선생님을 따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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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프를 다 들은 뒤 나는 기쁨에 젖어 오늘 할 일을 내일로 깔끔히 미룬 뒤 시간표를 보고 미리 가방까지 챙기고 (그런 적이 별로 없었다) 편안한 잠자리를 위해 소등을 하고 FM 라디오를 켜고 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그때 문이 열렸다. 아버지셨다. 아버지는 과일을 든 쟁반을 들고 계셨다. 모처럼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뵈는 아들을 격려하고자 그리고 필시 꾸벅꾸벅 졸고 있을 아들에게 또 한 소리 하시고자 한 의도였겠는데 펼쳐진 것은 캄캄한 방과 라디오를 따라 흥얼거리며 큰대자로 뻗은 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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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뭐야. 고3이라는 놈이 열 시 반에 자빠져 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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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 벌써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고 나는 자리에서 주섬주섬 일어나서 뭐라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서한샘 선생님이 잠오면 자는 게 낫다, 꾸벅꾸벅 졸아봐야 별 거 없다고 했다 운운 하는 참인데 갑자기 아버지가 벼락같이 호통을 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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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샘이라는 놈 선생도 아니다. 무슨 선생이 그런 얘기를 해. 잠 오는 거 다 자고 놀고 싶은 거 다 놀고 무슨 공부를 해. 그 자슥 이상한 놈이네. 또 그런 얘기를 듣고 자빠져 자는 놈은 또 뭐하는 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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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한샘 국어라고...... ”
“국어 선생이야? 한심한 놈 같으니라고. 국어 선생이든 영어 선생이든 네가 지금 잠이 오냐? 잠이 와? 바늘로 허벅지 찔러 가면서 공부해야 될 놈이 선생이 자란다고 자빠져 자?”
“아니 저기 테이프로......”
“허구헌날 음악 테이프나 듣고 말이야. 대체 선생이란 사람이 애들 긴장을 시킬 생각은 안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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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끝내 서한샘 선생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셨고, 정확히 말하려면 알려고 하지 않으셨고 서한샘 선생님은 참으로 무책임하고 몰상식하며 무능하고 애들한테 영합하려는 얄팍한 교사로 낙인찍히셨다. 그날 서한샘 선생님의 귀는 무척이나 간지러웠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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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샘 선생님은 수많은 학생들의 성적표와 그 후의 인생 행로에 수많은 밑줄을 남기고, 그리고 그 쟁쟁한 목소리의 추억을 남기고 이제 우리 곁을 떠나셨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아울러 추억의 한 조각을 소환하여 평화로운 밤, 가볍게 키들거릴 기회를 마련해 주신 것에 마지막으로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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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한 분 유호 작가에 대해서는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내일로 미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