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어 떼무덤 앞에서의 희망

sanha8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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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어 떼무덤의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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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쯤 전, 설 연휴를 지낸 며칠 뒤 무시무시한 늦추위가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기온이 급강하 폭격기처럼 내려갔고 전날 입었던 잠바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가 어마 차거라 하고 발걸음을 돌려 오리 털 파카를 챙겨 입고 출근을 할 정도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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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날 촬영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고생할까 혀를 차면서, 따뜻한 사무실에서 아늑한 웹 서핑이나 즐기면 되는 행운의 스케쥴에 희희낙락하고 있는데 회의를 끝내고 돌아온 선배가 갑자기 제 머리에 얼음물을 끼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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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해안에 숭어 양식장들이 많은데, 이번 추위로 떼죽음을 당했단다. 잽싸게 가서 꼭지 하나 말아 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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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해안이라면 당일치기로는 어렵고 최소한 1박 2일의 출장을 감행해야 합니다. 출장지는 황소바람 저리 가라 할 고래바람이 살기를 머금고 휘몰아치는 남도의 바닷가 전라도 영광으로 정해졌습니다. 가시 박힌 사슬로 몸을 휘감는 것 같은 맹추위 속에 겹겹이 중무장을 한 채, 그리고 아직도 뜻하지 않은 비운에 불만이 가시지 않은 입술을 하고서 양식장에 들어섰을 때 저는 추위 아닌 다른 이유로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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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평 규모의 양식장의 물은 거짓말처럼 하얗게 얼어붙었고 그 투명한 얼음장 밑에는 수만 마리의 숭어 떼가 마치 살아 있는 듯 줄을 지어 죽어 있었지요. 지금이라도 봄바람 불어 얼음 아래 숨구멍만 트이면 거짓말처럼 살아 움직일 것처럼, 동장군이 칼바람을 휘두르기 전, 떼를 지어 헤엄치던 모습 그대로 그들은 얼음 속의 화석이 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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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제가 집중적으로 취재했던 한 아저씨는 벌이는 일마다 자연재해가 따라다녀 수억의 빚을 떠안은 채, 마지막 승부수로 숭어 양식장을 시작했던 농부였습니다. 그에게는 아이들에게 빚 떠맡기지 않고, 시집 장가 온전히 보내고자 하는 최후의 희망마저 얼어붙은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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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풀리기 시작하자 또 하나의 사단이 생겼습니다. 동태가 된 채 둥둥 떠오르는 수만 마리 숭어들의 시신을 거두는 일이었지요. 그냥 물 속에서 썩어 들어간다면 결국 양식장 전체가 생선 썩는 냄새로 가득한 쓰레기 더미가 될 판이니까요. 주인 아저씨는 보트 위에서 얼음을 깨고 뜰채로 숭어들을 건져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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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수습한 숭어들이 양식장 주변에 산처럼 쌓여 갈 때, 양식장에는 몇 대의 승용차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얼굴에는 슬픈 표정 잔뜩, 그리고 위로를 건네는 말에는 나긋나긋함이 흘러 넘치고 있었지만 눈치를 살피니 양식장 주인과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아닌 듯 했습니다. 일면식 없는 사람들의 위로 방문이라니...... 카메라를 들이밀고 오가는 대화에 신경을 곤두세웠는데 주인 아저씨의 표정이 그렇게 산뜻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얼마 준다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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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아닌 방문객들은 횟집 사장님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위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흥정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흥정도 아니었지요. 물 풀리면 저 숭어들은 즉시로 썩어버릴 텐데, 그렇게 되느니 '담배값'이라도 드리고 가져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 아니냐"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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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인즉슨 그르지 않습니다. 어차피 얼음이 걷히면 숭어들은 그대로 허연 배 내놓은 채 썩어가며 동네방네 들짐승과 날짐승들을 불러들이겠지요. 하늘만 쳐다보던 주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횟집 사장님들은 신이 나서 푸대 자루에 숭어를 담기 시작했습니다. 마리 수를 헤아려 가격을 매기던 숭어는 터질 듯한 푸대 자루당 배춧잎 한 장, 그것도 아니면 천 원 짜리 몇 장에 허무하게 팔려 나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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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꽁 얼어붙은 거니 신선도는 그만이지 뭐야." "허허 급속 냉동이지 뭐 급속 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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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이런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자신들의 짐칸을 꽉꽉 채운 후 그 '신선도'를 걱정하듯 바람처럼 양식장을 빠져나갔습니다. 어차피 썩을 생선들 유용하게 쓰겠다는 그들의 말은 어찌 보면 합리적입니다만, 입이 귀밑에 걸린 그들의 표정이 저는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습니다. 저처럼 그들이 꼴보기 싫었던 것인지, 아니면 숭어들이 헐값으로 푸대에 담기는 것이 보기 싫다는 듯 아저씨는 저 멀리 양식장 건너에 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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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혼자 놔 두고 싶었지만 또 이 직업이 어쩔 수 없는 직업이라 저는 카메라를 들고 아저씨께 갔습니다. 그 표정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으니까요. 하지만 뜻밖에도 아저씨의 표정은 처절하지(?) 않았습니다. 되레 점점 얼굴에 미세하지만 확연한 미소가 번져 가고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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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어요. 고인 물에 있던 숭어들은 다 얼어 죽어 부렀지만 여기 물 들어오는 물길에 있던 숭어들은 살아 있어요. 용허네요. 그 추위에도 살아 남았어.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녕이 있긴 있는가벼. 저 숭어들을 봉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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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얼음이 낀 물 아래에서 살아남은 숭어들이 느릿느릿, 그러나 분명히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양식장에 있던 숭어 전부의 100분의 1도 못되긴 했지만 어쨌건 지켜보는 사람의 눈물까지 얼게 만들었을 추위로부터 살아남은 숭어가 있다는 사실이 아저씨에게 희망의 핑계가 된 것입니다. 무너진 하늘 사이로 엷게 드리운 '구녕'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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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저녁 어둠이 깔리는 비포장 시골길을 돌아 나오는데 길 어귀에 서 있던 용달차 한 대에서 누군가 다급히 뛰어내려 우리를 가로막았습니다. 그리고는 양식장 사정을 세세히 묻더군요. 그래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고 말해 주니 이마를 싸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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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겠네. 가야 돼 그냥 포기해야 돼." 그는 '큰돈은 아니지만' 주인 아저씨에게 받을 돈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양식장이 죄다 망가졌다는 소문 듣고 한걸음에 달려 왔지만 양식장에 들어갈까 말까를 망설이고 있다고 했지요. 쫄딱 망한 사람 앞에 가서 돈 얘기하기 미안한 마음과 어쨌든 오늘 내일 돈을 받지 못하면 본인이 대신 물어 줘야 할 상황 사이에 끼여 주저주저한 지 두 시간째라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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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하소연을 들어 주기엔 제가 시간이 없어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구불구불 이어진 해안 염전 길 2차선 도로를 따라 도는데 한 용달차가 위험스레 우리 차를 추월해 질주합니다. 눈을 부라리며 그 뒤꽁무니에 험악한 욕지거리를 내뱉었는데 렌트카 기사 아저씨가 웃으며 말하더군요. "결국 말 못하고 가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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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우리가 지나쳤던 그 용달차였습니다. 용달차 아저씨는 우리가 떠난 직후 그냥 발걸음을 돌리는 걸로 결정을 내린 듯 했습니다. 시간상으로 그가 양식장 주인을 만나러 들어갔다 올 여지는 없었으니까요. 그렇게 심약한(?) 자신에게 화라도 난 듯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 그래서 점점 멀어져 가는 그 용달차의 브레이크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제 머릿 속엔 윙윙거리는 겨울 바람처럼 속시끄러운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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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버릴 거 담배값이나 벌라며 푸대자루에 숭어를 긁어 담던 너무도 합리적인(?) 이들의 유들유들한 얼굴을 떠올리면 한없이 어두워지는 마음이었지만, 살아남은 숭어 몇 마리에 지푸라기같은 용기를 내 보려던 양식장 아저씨와 그 아저씨한테 받을 돈 받아내기 위해 먼 길 왔건만 끝내 얼굴조차 마주하지 못한 채 핸들을 꺾어 버린 용달 아저씨의 브레이크 등은 잔뜩 드리워진 어둠 속에 동동 떠 가는 희망의 불씨 같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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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년 한 해. 아직은 한 해 전망이 맑다고는 할 수 없고 미세먼지는 더욱 기승이겠습니다만 용달 아저씨같은 마음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우리 눈앞은 조금씩 더 트일 것이라 믿습니다. 또 최악의 상황에서도 작은 희망을 애써 긁어내던 숭어 양식장 주인 아저씨의 마음도 더 많은 이들에게서 찾아지기를 바랍니다.

기해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스티미언 여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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