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3월11일 <자유부인> 논쟁 개시.
1954년 1월 1일 서울신문에는 눈에 띄는 제목의 소설이 연재되기 시작됐다. '자유부인' '자유'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 끝난 지 6개월도 지나지 않은 때였지만 '자유'가 '부인' 앞에 붙으니 그 어감이 묘했다. 대학 교수의 부인 오선영 여사가 삶의 권태를 이기지 못해 대학생과 춤바람이 나는 등 탈선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역시 젊은 여자에게 매혹되던 남편의 용서를 받아 가정에 복귀한다는 내용이었으니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고리타분하기까지 한 스토리였으나 1950년대의 한국에서는 A급 태풍과 같은 내용이었다. 이 소설을 실었던 서울신문은 낙양의 지가를 올리며 승승장구했는데 연재가 끝나자마자 5만 2천부가 떨어져 나갔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한다.
.
태풍을 이루는 저기압들의 속 사정은 다양했다. 남자들은 침을 꼴깍 삼키며 오선영의 탈선 행각을 읽으면서도 여자가 바람나는 이야기가 버젓이 신문에 실리는 데에 짐짓 화를 냈고 대학 교수들은 왜 교수 부인이 등장하냐며 이건 대학 교수에 대한 모독이라고 발끈했고 여성계는 여성 모독이라고 물고 늘어졌다. 그러나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이었을까. <자유부인>의 인기는 욕을 들으면 들을수록 구름 위를 노닐었다. 계속 <자유부인>의 인기가 상승가도를 달리자 마침내 작심한 비판의 포화가 작렬하기 시작했다.
3월1일 서울대 교수 황산덕은 대학신문 지면에 <자유부인>의 내용을 통렬하게 비난하는 글을 싣는다. ‘자유부인 작가에게 보내는 글’에서 황산덕은 이 소설의 작가가 ‘갖은 재롱을 부려가며 대학교수를 모욕하고 있다’고 일갈하면서 자유부인 타도(?)의 포문을 연다. 정비석도 만만치 않았다. 그로부터 열흘 뒤인 3월 11일 황산덕에게 보내는 격렬한 반박을 지면에 실음으로써 자유부인 논쟁이 시작된다. "작품을 다 읽지도 않고 작품을 중단 운운하는 것은 오히려 문학가를 모욕하는 탈선적 폭력이며, 그러한 허무맹랑한 원성에 결코 개의하지 않을 것이다." 비장한 반박에는 "대학 교수답지 않게 흥분한다."는 적절한 조소도 끼어 있었다.
.
이에 발끈한 황산덕은 다시 제기한 비판에서 그후로도 오랫 동안 회자되는 표현을 구사한다. 그의 말을 좀 길게 들어보자.
"현실 폭로 자체가 문학인 것이 아니라 그 속의 문학 정신이 그것으로 하여금 문학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남녀관계만이 문학이고 성욕만이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한국의 진정한 문학을 좀먹고 문학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악화시키는 귀하야말로 문학을 전혀 이해하지도 못하고 야비한 인기욕에만 사로잡혀 저속 유치한 예로 작문을 희롱하는 문화의 적이요, 문학의 파괴자요, 중공군 50만 명에 해당하는 조국의 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중공군 50만 명! 북진 통일을 좌절시켰으며 한국전쟁 말미에는 전선의 태반을 담당하여 전쟁을 치렀고 개입 초기, 한국군이 자신들의 공격에 여지없이 무너졌던 추억 때문에 미군을 피하고 한국군만 골라서 공격하기도 했던 ‘중공군’은 그 시대 한국 사람들의 무겁고도 버거운 '주적'이면서 악마 또는 원수의 대명사였다. 소설 하나가 그 중공군 30개 사단과 맞먹는 위력을 갖고 있다니.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는 영국인들의 흰소리의 주인공 셰익스피어가 죽은 이래 이런 찬사(?)를 받은 작가가 또 있었던가.
.
지상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엉뚱한 문제가 발생한다. 한국의 사회상을 그리다보니 그 부패 문제가 언급되었는데 북한이 <자유부인>을 대남 비방용 텍스트로 참고서로 이용한 것이이다. “요즘 남조선에서 인기를 끈다는 자유부인이라는 소설을 보니까니 국회의원이라는 것들이......” 북한이 뭘 한다면 전신마취를 했어도 벌떡 일어나는 특무대가 그것을 가만 두고 볼 리 없었다. 일생에 도움이 안되는 북한 때문에 <자유부인>은 이번엔 외설 문학이 아닌 '이적표현물'이 되어 정비석은 특무대와 경찰에 발이 닳도록 불려 다니고 적잖이 고초도 겪어야 했다. "연재 신문이 정부 기관지 서울신문이 아니었다면, 내가 이북에서 추방당한 지주 출신이 아니었다면, 서울신문 간부가 자신을 위해 애써 주지 않았다면" 자유부인은 끝내 그 끝을 보지 못했으리라는 것이 정비석의 회고다.
.
그런데 <자유부인>이 왜 그렇게 인기가 있었을까. 이른바 야해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극명한 것은 정비석이 곤욕을 치렀던 이유처럼, 그 소설이 1954년 대한민국의 단면을 치밀하고도 생생하게 그려 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전쟁 직후 숱한 남자들이 전사하거나 일상의 새로운 전쟁터에서 탈락한 자리는 여성들이 메우고 있었고,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본격화하던 시기였으며, 어느 전쟁이든 그 그림자에서 번성하는 허무와 퇴폐의 홍등들은 우후죽순의 신드롬이 되어 전후 한국을 뒤덮고 있었다. 거기에 사교춤으로 대변되는 미국 문화는 둑 무너진 강처럼 남한 사회를 휩쓸며 도도히 흘렀다.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었고, <자유부인>은 그 분위기를 선도했다기보다 그저 생생하고 솔직하게 담아낸 작품일 뿐이었다.
.
그 사실을 깨달았던 것일까. "중공군 50만보다 더 무서운 놈"이라는 독설을 퍼부었던 황산덕과 소설가 정비석은 절친한 친구 사이가 된다. 후일 황산덕은 한국 사회가 자유부인에 묘사된 것보다 더 썩어가고 있다고 개탄하기도 했다 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부패'(?)에 대해서는 관대했는지 모르나 그 후로도 오랫 동안 여성의 ‘타락’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하고 단호했다
.
. 자유부인의 핵심 모티브가 된 '사교댄스'는 수 차례의 된서리를 맞은 후 오랫 동안 음지에 갇혀야 했고, '제비'와 '싸모님' 또는 '춤바람'으로 대변되는 음습한 분위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장바구니 들고 캬바레 간’ 아주머니들은 단골 뉴스 꺼리로 등장하여 손가락질을 받았고, 춤바람 난 여자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여자로 치부되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춤을 추다 걸리면 즉심에 회부되기 일쑤였고 무도장을 만들었다가는 구속되기 십상이었다.
정부가 풍속영업규제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사교댄스를 가르쳐도 경범죄로 처벌받지 않게 되고, 무도학원과 무도장은 경찰서장에게 설립을 신고한 후 영업이 가능해져서 ‘사교춤’이 시민권을 본격적으로 획득한 것은 1991년 3월 7일의 일이었다. <자유부인>이 지면에 등장한지 37년 후였고, 그 해에 <자유부인>의 소설가 정비석이 죽었다. 이렇게 역사는 가끔은 서투른 코미디언 같을 때가 있다. 유쾌한 폭소보다는 씁쓸한 실소를 자주 선사한다는 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