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4월 12일 자유를 향해 날아간 새 김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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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 엘리어트는 한국 사람이었나 보다. 그가 왜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는지는 모르나, 한국의 4월만큼 잔인한 4월을 가진 나라도 드물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역사꺼리를 뒤적이다가 검색창마다 튀어나오는 음산한 이야기들에 진저리가 쳐질 정도다.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했다는 혐의로 인혁당 관련자들이 사형 선고 다음 날 교수대에서 목숨을 빼앗겼던 것이 4월 9일이었는데, 바로 그 이틀 뒤, 또 하나의 잔인한 4월이 대한민국의 봄을 유린한다. 1975년 4월 11일 또 한 명의 젊은이가 야만의 독재에 항거하며 스스로 할복하고 다음날인 4월 12일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 이름은 김상진. 서울 농대 축산학과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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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4월 8일, 그러니까 인혁당의 8인에게 입에 담기조차 버거운 단어 '사형'이 내리쳐지던 날, 유신 정부는 긴급조치 7호를 발표한다. 긴급조치 7호의 내용을 꼼꼼히 받아 써 보면 이러하다. 우선 첫 조항은 "75년 4월 8일 하오 5시를 기해 고려대학교에 휴교를 명한다."였다. 아무리 30년쯤 뒤 대통령을 배출할 학교라고는 하지만, 그 대접이 과분하다. 2조로 넘어가면 점점 더 그 시비조가 우스꽝스러워진다.
"동교 내에서의 일체의 집회 시위를 금한다."
한 나라의 정부가 일개 대학교를 향해 엄포를 놓는 가운데 4조를 읽으면 폭소가 터져나온다. "국방장관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 병력을 동원하여 동교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 용감할손 대한민국 국군. 그대의 적은 고려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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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에야 깔깔거릴 수 있되 그 잔인한 4월은 경망스러움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유별나게 황사가 심했던 그 해 봄, 유신의 살기는 마치 황사처럼 온 대학가와 대한민국을 뒤덮고 사람들의 눈을 찌르고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고려대학교에는 군인이 진주했고 각 대학교는 철문을 굳게 잠갔다. 그러나 그 어떤 잔인한 폭정과 서슬 푸른 권력의 독기 앞에서도 할 말은 하는 사람들이 있어 왔던 것이 우리 역사의 전통이자, 인류사의 증언. 긴급조치 발표 사흘 후 그에 대한 댓거리가 수원의 서울대학 농과대학에서 터져 나왔다. 그 주인공은 4학년 김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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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까지 다녀온 복학생 김상진은 학내 지하 서클의 일원이긴 했지만 운명의 4월 11일 직전까지만 해도 "큰 목장에 취직할까 대학원에 진학할까"를 고민하던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하지만 학기 초 몇 번의 시위에도 불구하고 분위기가 뜰 기미를 보이지 않자 김상진의 마음도 바뀌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복학하고 보니 조직이 개판이다. 바로잡아야겠다." (신동호, <70년대 캠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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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산학과 대책위원장 노릇을 스스로 떠맡은 김상진은 4월 11일 서울농대 3차 집회를 준비하면서 누구도 꿈꾸지 못할 일을 혼자서 꾸미기 시작한다. 양심선언문을 써서 각 방송국에 보냈고, 기자들에게 귀띔하여 서울 농대에서 비상한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알렸으며 후배와 함께 아이스크림을 사러 간 길에 후배도 모르게 칼을 장만해서는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자유 성토 대회의 연사로 연단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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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말이 순해진다고 하는데, 적어도 그 말은 그의 죽음 앞에서는 틀렸다. 이미 목숨을 끊을 각오를 하고 써내렸을 그의 글은 운명에 대한 순순함이 아닌 불의에 대한 역(逆)의 마음으로 그득했고 듣는 사람들의 몸을 떨리게 할만큼 격동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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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이상 우리는 어떻게 참을 수 있으며 더 이상 우리는 그들에게서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어두움이 짙게 덮인 저 사회의 음울한 공기를 헤치고 죽음의 전령사가 서서히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우리는 직시하고 있다.
무엇을 망설이고 무엇을 생각할 여유가 있단 말인가! 대학은 휴강의 노예가 되고, 교수들은 정부의 대변자가 되어가고, 어미닭을 잃은 병아리마냥 우리들은 반응 없는 울부짖음만 토하고 있다. 우리의 주장이 결코 그릇됨이 아닐진대, 우리의 주장이 결코 비양심이 아닐진대 우리는 어떻게 더 이상 자존을 짓밟혀, 불명예스런 삶을 계속할 것인가. 우리를 대변한 동지들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위에 신음하고 있고, 무고한 백성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가고 있다. 민주주의란 나무는 피를 먹고 살아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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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적으로 연설문을 읽어 내려가던 그는 "이것이 영원한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길이라면 이 보잘것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까지 읽은 뒤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칼을 빼들고서 "동요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라"는 말을 남긴 채 하며 칼끝을 자신의 배로 향한 뒤 사정을 돌보지 않고 꽂은 뒤 있는 힘껏 그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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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지금 뭐하는 거야?" 이런 사태를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친구들이 악을 쓰며 구르다시피 연단으로 뛰어올랐지만 이미 그의 배에서는 피가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김상진은 실려가면서 "애국가를 불러 달라."는 요청을 했고 친구들이 울면서 부르는 애국가 속에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다음 날 세상을 떠났다. 학생운동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는 그가 처음이다. 제대로 된 장례식도 치르지 못한 시신은 3일장도 넘기지 못하고 화장됐다.
1980년 김상진의 5주기에 모인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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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병은 고독 뿐이 아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은" 막막함도, " 겨울의 대지, 살점 묻은 바람, 계엄령 하의 조국" (김정환 시)에서 살아가는 미칠 것 같은 갑갑함도 사람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손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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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칭찬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목숨을 끊지 않고는 자유로운 외침 한 번 드날리지 못하는 시대, 숨을 쉬면 쉴수록 숨이 막혀 오는 지독한 황사 같은 체제에서 그 자살을 수이 폄하할 수 있는 자도 없다. 김상진은 그런 시대를 살았고 죽었다. 오늘 우리는 적어도 그런 시대에서는 벗어나 있다고 자부하고, 우리의 과거를 전설의 고향 시청하듯 바라보지만, 이것 하나만은 기억해 두고 싶다. 최소한 우리의 현재가 김상진의 시대와 다르다면, 그 변화의 물길은 그 시대와 맞섰던 사람들이 몸으로 파고 다져 만들어낸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한 가지 열적게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질문. 과연 우리는 우리 시대에 만족하는가. 지금이라도 우리가 내야 할 물길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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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미처 읽지 못한 양심선언문의 마지막 구절이 징소리처럼 머리 속을 한 바퀴 돈다 "저 지하에선 내 영혼에 눈이 뜨여 만족스런 웃음 속에 여러분의 진격을 지켜 보리라. 그 위대한 승리가 도래하는 날, 나! 소리없는 갈채를 만천하에 울리게 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