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의 최후

sanha8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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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9월 16일 사자의 최후

앤터니 퀸은 매우 다양한 인종의 배역을 소화한 배우 중의 하나일 것이다. <25시>에서는 유태인으로 몰린 루마니아인이었고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는 아라비아의 부족장으로 등장했으며,<희랍인 조르바>에서는 지중해 건너 그리스인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그가 소화했던 수많은 민족과 인종을 망라한 배역 가운데에는 리비아를 침략한 이탈리아 군과 맞서 싸웠던 독립 투쟁 영웅 오마르 목타르도 끼어 있다. 영화의 제목은 '사막의 라이언'이다.

독립 전쟁의 영웅으로서 오마르 목타르를 숭배했던 리비아 국가원수 무아마르 카다피는 아낌없는 오일 달러를 퍼부어 영화 제작을 지원했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같은 해에 제작된 007 시리즈보다 더 많은 돈이 들어갔다고 한다. 하지만 흥행에는 참패했다. 당연한 일이다. 백인 제국주의자들이 베드윈족을 학살하는 내용이 여과없이 등장하는 반제국주의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기란 쉽지 않으니까. 그런데 이 영화가 '제국주의'라는 말만 나오면 경끼를 일으켰던 전두환 치하의 대한민국에 수입되어 당당하게 상영된 것은 실로 이채로운 일이다. 대수로 공사 등 리비아에 이권이 많이 걸려 있던 터에 카다피가 이 영화의 개봉을 협상 조건으로 내걸었다는 설이 있지만 사실 관계는 알 길이 없다. 자, 그럼 오마르 목타르는 누구인가.

1911년 오스만 투르크 제국 치하에 있던 리비아의 트리폴리 해안에 이탈리아 함대가 나타났고 이들은 오스만 투르크에게 '꺼지라'고 요구한다. 3일간 포격이 이어졌고, 이탈리아군은 트리폴리를 점령한다. 안 그래도 각지에서 줘 터지던 '유럽의 환자' 투르크는 리비아를 떠나 버렸다. 이제 리비아는 우리 것이라고 득의양양하던 이탈리아였으나 샴페인을 터뜨리기도 전에 뒤통수를 맞는다. 시골의 코란 선생이었던 오마르 목타르가 이끄는 저항군이 등장한 것이다. 나이 쉰이 넘도록 코란을 암송하고 그 뜻을 가르치는 외엔 한 일이 없던 목타르는 이탈리아와 맞서기 위해 고향을 떠나면서 재미있는 말 한 마디를 남겼다고 한다.

"균형이 깨졌다."

여기서 균형이란 단순한 대칭적 균형은 아닐 것이다. 리비아에 살아온 사람들이 쌓아올린 합의와 공존의 테두리를 깨고 들어온 침략자의 존재를 그렇게 표현한 것은 아니었을지. 그로부터 20년 동안 목타르는 신출귀몰한 게릴라 전법으로 이탈리아 군을 궁지에 몰아넣는다. 여러 명의 이탈리아 군 사령관이 지지부진한 전황에 책임을 지고 본국으로 소환될 정도였다. 이탈리아가 절치부심하여 리비아로 보낸 인물이 그라치아니라는 사람이었다. 훗날 몽고메리의 영국군에게 기록적인 참패를 당해 당나라 군대의 대명사 이탈리아 군의 신화를 낳았던 사람이지만 리비아의 저항군에게는 가혹한 존재였다.

그는 저항군의 뿌리를 말리는 두 가지 정책을 실시했다. 하나는 이집트 리비아 국경을 봉쇄하여 보급을 차단하는 동시에 둘째 사막의 베드윈 족을 강제수용소로 집단 이주시킨 것이다. 제주도나 기타 지역의 산간마을에서 한국 군경이 빨치산을 봉쇄하기 위해 마을을 붙태우고 주민들을 소개시킨 것과 똑같은 이유였다. 베드윈족 12만명이 끌려갔으며 그 중의 2/3가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결국 '사막의 사자' 오마르 목타르도 부상을 입고 체포된다. 체포 당시 무크타르는 일흔이 넘었지만 호들갑스런 이탈리아인들은 이 사자가 무슨 조화를 부려 탈출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손과 발을 쇠사슬로 칭칭 묶었다. 그러나 사자는 역시 사자였다. 목타르는 한 번도 고개를 떨구지 않고 심문관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를 압도했고, 고문을 받으면서는 코란에 나오는 평화의 구절을 암송하며 고통을 이겨냈다.

이 늙은 리비아인은 이탈리아 법에 따라 사형을 선고받는다. 그는 마지막 말을 요구하는 이탈리아 사형 집행관에게 코란의 한 마디를 남긴다. "우리는 신에게 속하고 신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영화 속에서 목타르는 이런 말을 하고 교수대에 오른다. "나는 항복하지 않소. 우리 다음 세대, 그 다음 세대가 싸움에 나설 거요. 나는 내 사형집행관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거요."

앞서 언급했지만 이 사막의 사자는 무아마르 카다피의 영웅이었다. 그는 해외 순방시 목타르의 마지막 사진을 가슴에 걸고 다녔으며 자신을 목타르의 후계자라고 자임했다. 하지만 그는 목타르의 ‘균형’에 대한 경건함과 신에 대한 겸허함을 배우지 못했다. 시리아에서 벌어진 대학살에는 깡그리 모르쇠하는 처지에, 리비아에는 가공할 정의감을 발휘하여 잽싸게 폭격기를 보낸 서구 열강의 선택적 휴머니즘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신에게 속하고 신에게로 돌아갈" 무슬림으로서 카다피의 권세는 지나치게 혼탁했고 폭력적이고 절대적이었다. 자칭 목타르의 아들은 “나는 항복하지 않는다. 사형집행관보다 더 오래 살 것이다,”는 목타르의 말을, 그 국민들로부터 들어야 했던 것이다. 트윗상으로 전해진 정보에 따르면, 아흔 살이 넘은 목타르의 아들도 카다피에 반기를 들었다고 한다. (나이를 따져 보면 조금 고개가 갸웃거려지기도 하지만)

1931년 9월 16일, 불굴의 의지로 싸웠던 사막의 사자는 교수대에 매달렸다. 마지막까지 사자는 의연했고 그 최후를 지켜보먼 베드윈들은 그들 특유의 허밍 합창으로 사자의 최후를 기린다. 그러나 그 후계자를 자처했던 리비아의 국가원수의 최후는 주지하다시피 애처로울 정도로 비참했다. 자신의 국민들에게 쏘지 말라고 호소하던 그는 몰매를 맞고 항문을 막대기에 찔리는 최악의 학대를 경험한 끝에 정육점에 전시되는 또 하나의 야만의 희생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역사는 자주 심술궂다. 누군가를 숭배하는 이들은 대개 숭배하는 대상을 배신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끔은 그 배신의 댓가를 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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