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비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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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의 중앙시장 한 귀퉁이에서 31년 콩국수와 칼국수를 팔아왔다는 분을 찾아 나선 적이 있습니다. 주인 할머니가 이곳에 처음 터를 잡았을 때 콩국수 가격이 단돈 30원이었는데 지금은 3천원을 받으니 약 100배 가까운 인플레이션이 이루어진 세월 동안 할머니는 밀가루와 씨름해 온 셈이지요.

그 기나긴 시간 동안, 흔한 면발 기계 하나 들여놓지 않았던 주인 할머니는 손님이 가게 문에 드리운 발을 헤치고 들어올 때마다 일일이 면을 반죽했고 신기에 가까운 칼질로 면을 썰어내셨습니다. 당연히 그 솜씨가 한석봉 어머니가 머리를 조아릴 지경입니다. 손님들과 눈 맞추고 수인사를 나누면서도, 아예 뒤돌아서서 야채 대주는 아저씨와 흥정을 하고 셈을 치르면서도, 인터뷰를 할 때는 웃고 떠들면서도, 일정한 스피드와 굵기로 면발을 만들어내셨으니까요.

칼국수도 칼국수지만 주인 할머니의 콩국수는 중앙시장에서 이름이 나 있었습니다. 국산 콩을 아침 내내 갈아붙인 국물 위에 커다란 얼음 덩이로 식혀 내는 콩국은 인근 상인들 사이에선 여름철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별미였습니다.

“이 콩국이라는 게 시원찮게 하면 비리고 밍밍해서 못먹는다고. 근데 이 집은 진국이야.”

어떤 손님은 국수를 넣지 않은 콩국을 한 바가지 그득 단숨에 들이킵니다. 자기는 면을 싫어해서 그냥 콩국만 먹으러 온다나요. 여름엔 그 이상 가는 보약이 없다면서 두 대접을 연거푸 들이킨 뒤 배를 두들기며 나갑니다.

촬영을 한참 진행하는데 주인 할머니가 뭔가 공개할 것이 있다며 가게 안에 딸린 작은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굽은 허리를 펴고 까치발을 하고서 장롱 위에 숨겨진 뭔가를 꺼내려고 애쓰던 할머니가 마침내 제 앞에 내민 것은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한 낡은 노트였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맞춤법이 엉망인 할머니의 육필이 가득 담겨 있었고요. 그 육필의 내용은 대충 이런 것이었습니다.

"엄마넌 니가 배달 당기너라 숙제 못핸 거 지금도 가슴 아프다. 너 공부 만이 못시킨 거 미안하다. 하지만 지끔부터 내가 하는 말이 네게 주는 공부라고 생각해라. 김치 만드는 법, 내가 쓰는 양재기에 국물 만드는 법 콩국수 만드는 법."

몇 g, 몇 ㏄가 아니라, 당신이 사용하는 컵의 2/3, 양재기의 절반, 멸치는 절대로 큰 것도 안되고 작은 것도 안되고 중간 것 등등. 할머니는 일생 동안 체득하고 쌓아올린 경험의 모두를 그 노트에 담아 두고 있었습니다. 이걸 누구한테 보여 주려고 이렇게 꼼꼼히 써 놨냐고 물으니 할머니는 눈을 껌벅껌벅하면서 언젠가 아들에게 내 주려는 자신만의 비밀문서랍니다. 그 아들은 당신에게 매우 특별한 아들이었다지요.

"자식들 가운데 유난히 착한 애였어요. 다른 애들은 일 시키면 도망가도, 걔는 학교 갔다 오자마자 배달통 들고 자전거 타고 달려나갔어요. 콩국수 하루에도 몇십 그릇씩 배달하고 다녀서 나중에는 어깨를 다치기도 했어요. 얼마나 미안하고 고마웠는지 몰라요."

어머니에게 그 비밀 문서는 아들에게 물려 줄 수 있는 가장 큰 유산이었을 것 같습니다. 위대한 유산의 첫머리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지요.

󰡒이것만 알면 어디 가서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다.

촬영을 잠시 중단한 채 골방에 틀어박혀 큼직큼직하지만 삐뚤삐뚤에 띄어쓰기 전혀 없는 글씨들을 어렵게 읽어내렸습니다. 장사가 끝난 한밤중, 어머니가 침침한 눈을 부비고 볼펜을 꾹꾹 눌러 가며 뭔가를 써 내리는 영상이 노트 위를 파노라마처럼 흘러 지나갔지요.

그 비밀문서의 상속자(?)로 어머니가 지정한아들은 현재 번듯한 다른 직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 마치고 와서 설겆이를 도와 줄 정도로 효자이긴 합니다만, 아직 어머니의 일을 본격적으로 물려받을 요량은 없는 듯 했지요. 그래도 어머니는 그 비밀문서가 언젠가는 아들에게 쓸모가 있으리라, 쓸모가 없더라도 험한 세상 살아가는 데 최후의 보루같이 든든한 '빽'으로 남으리라 확신하고 계셨습니다.

누렇게 바래버린 노트 위의 글에는 몇 번이고 수정된 흔적이 있었습니다. 하루 날 잡아 쓴 것이 아니라, 몇 달 또는 몇 년을 두고 어머니는 이 노트를 완성해 온 것이지요. '이렇게 하는 것이 더 맛있더라, 저걸 넣으니 맛이 달라지더라'고 고쳐 쓰면서 말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음식을 만들고 맛을 보다가 그래 이맛이야~~를 외친 후 밀가루 묻은 손을 또는 고춧가루 덕지덕지 나붙은 채로 골방에 뛰어들어와 자신의 비밀문서를 수정하는 모습을 말입니다. 그리고 다시 노트를 접어 넣은 후 당신의 이 배려가 훗날 아들에게 도움이 될 날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을 생각하며 어머니는 살포시 웃었겠지요.

일을 마친 다음 저는 즉시로 핸드폰을 꺼내 저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었습니다.

"웬일이냐?"

"별 일 아닙니다. 오늘 날씨 참 좋죠?" (거 참 이렇게 할 말이 없는 자식이라니......)

"싱거운 녀석 웬일이냐? 네가 일 없이 전화를 다 하고......"로 이어지는 밋밋한 통화였지만 그래도 꼭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날 알았습니다. 제가 어머니께 '별 일 없이' 전화드리는 날은 참 드물었다는 걸 말입니다. 또 그날 돌이켜 깨달았습니다. 콩국수 할머니의 노트만큼이나 어머니는 제게 정성을 쏟으셨다는 것을, 그리고 저는 그를 대부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어버이날입니다. 꼭 무슨 날을 만드는 뜻은 그날이라도 기억할 것을 기억하라는 뜻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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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국수.jpg

어머니의 비밀문서 | Ecenc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