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공농성의 효시, 떨어지다.

sanha8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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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8월 13일 고공농성의 효시,떨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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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평균 일이십전의 수입을 가지고 온갖 고통을 맛보아 가며 근근히 그날 그날을 지내오던 바, 요즘은 연말연시로 (음력 설) 그나마 돈을 벌 곳이 없게 되어 남들은 마음껏 뛰어노는 이때에 기한(飢寒)을 부르짖는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다." 1926년 2월 동아일보가 평양의 유명한 빈민굴 서성리를 취재한 기사다. 평양은 당시 조선 굴지의 공업도시이자 '종교왕국'으로서 로서 공장 굴뚝과 '신선루같은 예배당'은 나날이 늘고 있었지만 동시에 '살 길은 잃고 집은 헐리워 뒤로 몰려 더 갈 곳이 없는' 최하층의 빈민들이 보통강변에 모여 살았고 그 인구가 7천여 명을 헤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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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극빈자 수를 조사하고서 놀랐지만 평양에 비하면 매우 약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동아일보의 한탄이었다. 이 서성리 빈민굴에서 1932년 8월 13일 서른 둘의 여자가 세상을 떠난다. 그 이름은 강주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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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미국발 경제 대공황이 시작된 후 전 세계는 불황의 도미노에 빠져들었다. 식민지 조선도 예외는 아니었다. 21세기에도 불경기가 닥치면 비정규직, 계약직부터 잘려 나가는 것처럼, 안 그래도 열악한 처우와 민족 차별에 시달리던 조선인 노동자들은 최우선의 총알받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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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5월 평양 평원 고무공장의 조선인 사장은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깎겠다고 선언했다. 노동자들은 이를 수긍하지 않고 파업에 들어갔지만 1931년의 고무공장 사장은 21세기 모 대기업의 조씨 성 가진 회장처럼 완강하고 지독했다. 차라리 굶어죽겠다고 노동자들이 '아사(餓死)농성'을 벌이자 경찰을 불러 노동자들을 쫓아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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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 간부였던 강주룡은 목이라도 매달고 죽기 위해 광목을 샀다. 의좋기로 소문났던 남편이 독립군에 입대한 후 그를 따라다니면서도 용케도 죽지 않았고, 남편이 전사한 후 돌아온 시댁에서 남편 잡아먹은 년이라 구박받으며 일주일을 굶을 때에도 어떻게든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정말 희망이 없었다. 이 나무로 할까 저 나무로 할까 죽을 곳을 찾아 헤매던 그녀의 앞에 평양성의 망루 을밀대의 지붕이 홀린 듯 나타났고 그녀는 전혀 다른 마음을 먹게 된다. 목을 매려던 광목을 밧줄삼아 을밀대 지붕 위에 기어 올라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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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새벽 을밀대 앞을 지나던 사람들은 웬 젊은 여자가 을밀대 지붕 위에 웅크린 모습을 보고 사람이냐 귀신이냐 기함을 한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앞에서 강주룡은 피맺힌 호소를 터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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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49명 우리 파업단의 임금감하를 크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평양의 2천3백명 고무공장 직공의 임금감하의 원인이 될 것이므로 우리는 죽기로서 반대하려는 것입니다......나는 평원고무사장이 이 앞에 와서 임금감하 선언을 취소하기까지는 결코 내려가지 않겠습니다. .......여러분, 구태여 나를 여기서 강제로 끌어낼 생각은 마십시오. 누구든지 이 지붕 위에 사다리를 대놓기만 하면 나는 곧 떨어져 죽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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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 몇 개만 바꾸면 2011년, 수백 일 동안 크레인 위에 매달려 있던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호소와 다르지 않다. "1970년 청계천 재단사 전태일의 유서와 2003년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라고 김진숙 위원이 통탄을 한 바도 있지만 1931년 을밀대 지붕 위에 광목을 비끄러매고 올라간 이와 2011년 크레인 출입문에 용접을 해 버린 채 허공의 감옥에 스스로 갇힌 여성노동자의 호소는 80년 세월을 뛰어넘어 비참하게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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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밀대 지붕에서 끌려 내려온 강주룡은 경찰서로 연행됐지만 76시간 동안이나 물 한 모금 먹지 않는 단식 투쟁을 벌였다. 천하의 일제 경찰도 을밀대 올라간 죄로 강주룡을 오래 잡아둘 수는 없는 노릇, 검속 기간이 끝나자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석방한다. 사흘을 꼬박 굶은 강주룡은 그 길로 파업 현장에 복귀하여 동료들을 격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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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놈이 이긴다"고 했던가. 마침내 1931년 6월 8일 기업주는 임금 삭감을 철회한다. 강주룡을 비롯한 노동자들의 승리였다. 하지만 그 만세 소리의 여운이 채 가라앉지도 않은 6월 9일 강주룡은 일제가 "평양 최초 최고의 적색노동조합’ 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던 평양지역 혁명적노동조합에 참여했던 것이 관련되어 체포되었고 그녀는 또 다시 꼬박 이틀을 넘어 곡기를 끊어 항거했다. 그로부터 시작된 1년의 옥살이는 강주룡의 안그래도 고단했던 육체를 망가뜨렸다. 극심한 소화불량과 신경쇠약이 그녀를 괴롭혔고,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이미 그녀의 몸은 삶을 지탱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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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8월 13일, 평양 성민들도 코를 싸매고 지나가는 음습한 서성리 빈민굴의 한 움막집에서 우리나라 고공 농성의 효시였던 강주룡은 기구했으나 용감했던 생애를 마감한다. 강주룡은 "65세의 노모와 61세의 부친, 서른 셋의 오라비와 열 다섯의 동생"으로 기록된 집안의 가장이었다. 가진 건 몸뚱아리 하나에 먹여 살려야 할 입은 넷이었던 젊은 과부에게 임금 삭감 그리고 해고란 죽음과도 같은 단어였을 것이고, 그녀는 그 죽음 같은 단어를 피하기 위해 싸우다가 창창한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그 죽음을 기억한 백 여명의 노동자들이 모여들어 그 마지막 길을 전송한 것이 그나마 그녀에게 위안이 되었을까. 을밀대 지붕 위에서 그녀는 이렇게 외쳤더랬다. "내레 배운 거 하나는 대중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라는 겁네다." 그녀는 명예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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