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금메달

sanha8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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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8월1일 해방 이후 최초의 금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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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초등학교 교문에 막 들어서던 해의 여름, 나는 부산의 양정동이라는 동네에 살았다. 그때 나는 그 동네 이름과 비슷한 한 사람의 이름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그 이름은 양정모. 나는 그가 양정동 사는 사람이라 이름도 양정모인 줄로 믿었다. 그는 부산 사람이긴 했지만 양정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1976년 8월 1일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대한민국 건국 이후 최초의 금메달리스트였다.

정부수립이 된 직후의 그 어수선함 속에서도 신생 대한민국은 런던 올림픽에 참가하여 올림픽 무대에 첫발을 딛었고 심지어 전쟁 중인 1952년에도 핀란드 헬싱키까지 아득바득 날아가서 태극기를 달았다. 그 이후로도 정치적 요구로 불참한 모스크바 올림픽을 제외하면 참석을 빠뜨린 적이 없었고, 성과도 그런대로 있는 편이어서 로마 올림픽을 제외하면 메달을 전혀 따지 못하고 귀국한 적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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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하나 유감스런 사실은 그렇게 따 온 메달이 몽땅 은메달과 동메달이라는 점이었다. 즉 수십 년 동안 금메달리스트의 특권이라 할 국가 연주를 들은 한국 선수는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한국인으로서 금메달리스트라고는 일제 시대 일장기를 달고 뛰었던 손기정이 유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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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선수들의 능력보다는 다른 정황이 메달 색깔을 좌우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56년의 멜버른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송순천의 경우 사실상의 금메달리스트였지만 상대가 동독 선수였다는 것과 5명의 심판 중 3명이 공산 국가 출신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송순천은 3라운드 내내 흠씬 두들겨 패고도 판정에 지고 말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은메달을 달고 돌아온 송순천에게 “승리를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국민이 주는’ 금메달을 쥐어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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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건 수십 년 동안 줄기차게 올림픽에 도전했지만 그놈의 골드는 철저하게 개발도상국 코리아를 외면했다. 그런데 그나마의 자존심이 흙바닥에 내팽개쳐지는 일이 발생했다. 1963년까지 IOC 회원국이 아니어서 올림픽 참가를 못했고, 국가 호칭 문제나 여타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출전을 거부했던 북한이 최초로 참가한 뮌헨 올림픽에서 대뜸 금메달을 거머쥐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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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격 종목에서 우승한 북한의 이호준은 "원수의 가슴을 쏘는 심정으로 쏘았다."고 심경을 밝혀 올림픽 조직위를 들끓게 하는 한편, 은메달 하나 달랑 땄던 남쪽 '원수'들의 복장을 터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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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 열린 몬트리올 올림픽도 막바지로 치닫던 시간, 이미 북한은 금메달 수확에 성공했지만 한국은 여전히 노 골드였다. 마지막 희망은 폐막 네 시간 전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 결승전에 출전하는 양정모였다. 이때의 경기 방식은 요즘과 사뭇 달라서 이전 경기에서의 벌점과 경기 결과를 종합하여 성적을 결정했다. 쉽게 말해서 양정모는 폴패 또는 지나친 점수차의 패배만 당하지 않으면 몽골의 오이도프를 꺾고 금메달을 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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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원정 1승에 목말라 있던 2006년 독일 월드컵, 토고와의 경기에서 2대1로 리드하고 있던 한국팀이 시간을 끌기 위해 프리킥을 돌려 버린 거 기억하는가? 얼굴은 화끈거렸지만 속으로는 다행이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시간아 빨리 가거라 기도했던 그 순간을. 하물며 양정모의 결승전은 그 백 배의 흥분과 수십 년의 기대가 알알이 맺힌 경기였다. 당연히 코칭스탭은 양정모를 불러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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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폴패만 안 당하고 크게만 안 지면 이기는 거 알지? 수비 위주? 응 수비 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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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양정모의 반응은 뚱했다고 한다. “지더라도 정정당당하게 할랍니더.” 쯤 되었을 것이다. 발을 동동 구르는 코치를 외면하고 양정모는 폴승을 노리며 거칠게 달려드는 오이도프에 한치도 물러섬 없이 맞섰다. 두 번 싸워 1승 1패를 기록한 바 있는 호적수 오이도프를 한 번 이기고도 싶었을 것이고, 72년 뮌헨 올림픽 대표에 선발되어 놓고도 ‘소수정예만 보낸다’는 지침(이라고 쓰고 ‘우루루 보낼 돈이 없었다’라고 읽는다) 때문에 뮌헨행 비행기를 못탔던 한을 멋지게 풀어보고도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꼼수 없는 대결 끝에 8대 6으로 리드하던 양정모는 막판 뒷심에서 오이도프에게 밀려 10대 8로 지고 말았다. 그러나 종합 채점 결과는 1점 차이로 양정모의 금메달이 결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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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이었지만 전국에 호외가 뿌려지고 온 나라가 뒤흔들렸다. 태극기가 올라가고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모습을 보며 많은 이들이 감격에 떤 것은 당연지사. 양정모는 국민적 영웅이 됐다. 귀국 후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양정모가 “운동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학교”를 얘기하자 즉시 한국체육대학교가 설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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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꼬맹이로서 그 금메달의 후폭풍을 회고한다면, 금메달 딴 뒤에 양정모의 얼굴이 그려진 딱지 (동그랗게 오린 딱지에 새겨진 별의 숫자가 크고 작은 걸로 따먹기하던)에 별 열 개가 박혀서 판매됐다. 그 딱지만 가지면 거의 모든 딱지들을 다 눌렀다. 그 딱지 석 장만 가지고 있으면 동네 딱지왕은 거저 먹을 수 있었다.

지금도 물론 금메달은 귀하디 귀한 것이고 그를 목표로 선수들은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겠지만, 1976년 8월 1일의 금메달은 아무래도 그 순도가 조금은 더 높았을 것이다. 최초의 금메달이어서도 그랬겠지만, 나에게는 추가하고 싶은 의미가 있다. 양정모의 금메달은 "지더라도 정정당당하게”의 의연함이 "일단 따고 보자"의 얄팍함을 끝내 이겨낸 결과였기 때문이다. “어떻게”에 대한 질문은 전혀 없이 무조건 “부자 되세요.”가 만인에게 하는 인사가 된 나라에서,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 너무도 태연하게 당연한 나라에서 그 의미는 날이 갈수록 더 빛나지 않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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