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의 아쉬움 중 하나는 친구들에게 생일 선물을 거의 못 받아봤다는 것이다. 인간관계? 나쁘지 않았고, 친구? 적당히 있었으나 내 생일은 아쉽게도 여름 방학의 한가운데였다. 하루만 지나면 친구건 식구건, 모든 대소사를 셀프 리셋하는 어린 머스마들의 세계에서 방학 중의 친구 생일을 챙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꽃피는 춘삼월쯤으로 생일 부계정을 일찌감치 팠어야 했다. 고등학생 때까지 받은 생일 선물 중 기억나는 건 큼직한 빵 한 봉지와 그 빵을 담을 수 있는 양철함 정도였다. 두 명이 각각 빵과 통을 선물로 주었는데 서로 짜고서 그렇게 산 것은 아니었다. 초등 6년, 중고등 6년, 도합 12년 동안 친구들에게 받은 생일 선물이 설마 빵과 빵통뿐이겠냐만 기억에 남는 게 없으니 그냥 없었던 거로...
대학에 입학해서 첫 등교하는 날 우리 동기들은 수강신청서를 모두 반납해야 했다. 학내 문제로 전체 수업 거부가 이미 결의되어 있어서 1학년은 자동으로 수업에 들어가지 못했다. 등교 안 하면 절단나는 줄 알았던 스무 살 전의 학창시절이 무색하게 나는 개강 첫날부터 자유의 상아탑을 만끽했다. 며칠 후 교실에 있던 책상들은 각 강의동 앞에 쌓여 천막으로 덮였다. 학생들은 넓어진 강의실에서 밤샘 농성까지 불사했다. 모든 과가 학생회를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수업거부에 참여했고 무려 한 학기를 그렇게 학생들끼리만 보냈다. 그때는 한번 하면 이렇게 빡세게 하는구나 싶었지만, 그 후 그런 대규모의 수업 거부는 졸업할 때까지 없었다.
대학 첫 학기를 시원하게 말아먹고 학기 말이 오자 교수님들은 학점을 대체하기 위한 각종 리포트를 던져주셨다. 카드 돌려막기 하다가 막판에 몰려 오도 가도 못하는 심정으로 우리는 한학기를 정리해야 했다. 고등학교 교과서의 세 배만한 일반화학 교과서를 1장부터 10장까지 요약 정리하는 것이 1학년 일반화학 과목의 리포트였다. 화학과에 들어와서 한 학기 만에 처음으로 화학 관련 책을 펼쳐 보았다. 선배들도 수강 과목에 따른 각자의 숙제에 열중했다. 나를 포함한 선배 몇 명은 학생회실에 모여서 함께 공부했다. 그 중 1학년생은 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밥값 걱정은 없었는데 당시 선배라는 존재는 밥 사주는 기계나 걸어 다니는 자판기였기 때문이다.
리포트 제출이 끝나고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학교는 텅 비어 을씨년스러워졌고 밤에는 큰 길가의 가로등 빛이 자욱하게 내렸다.
함께 공부했던 선배들은 학교 밑 자취방에서 기나긴 방학을 보냈다. 나도 자취방에 머무르며 소일거리를 찾거나 아니면 선배들을 쫓아다녔다. 배고파서 쫓아다녔던 건 아니다. 꼭 아니라기보다는 그건 아주 사소한 부분이었다... 사소해도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인간관계를 먹을 것으로만 정의하면 안 되니까...되나요? ㅋㅋㅋ
무료했던 어느 날 선배의 호출이 있었다. 우리는 한 선배의 방으로 집결했는데 비디오를 보자는 것이었다. 선배는 큼직한 VHS 비디오 테이프 두 개를 준비했고 우리는 공포영화 두 편을 연달아 봐야했다.
영화를 다 본 후 선배들은 나에게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엉겁결에 훅 치고 들어온 느낌이었다. 잊고 있던 내 생일을 선배들이 기억해 주어서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고마움을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지만, 나는 그때 심하게 감격했었다. 생일 선물도 준비되어 있었다. 그것도 당시 몇만 원씩이나 하던 공학용 카시오 계산기였다. 물론 그 자리에서 선물 전달식 같은 거창한 행사를 열었던 건 아니고, 학교 어느 곳에 숨겨 놓았으니 찾으라는 것이었다. 그제야 뜬금없이 공포영화를 보여준 이유를 눈치챘다.
행정관 앞에 있는 조그만 정원에는 해녀 조각상이 서 있었고 그 옆에는 사람 두 세 명도 충분히 앉을 수 있는 커다란 맷돌이 있었다. 그 맷돌 가운데에 뚫려있는 구멍에 생일 선물이 있다고 했다. 오가는 사람도 없는 한밤중의 적막한 학교였지만 그 정도라면 어려운 건 아니었다. 큰 길가였으니까. 난 금방 갔다 오겠다고 말하고 학교로 향하는 언덕을 빠르게 올라갔다. 맷돌에 도착해서 구멍에 손을 집어 넣었더니 계산기가 아니라 쪽지가 잡혔다. 가로등 조명 쪽으로 쪽지를 펼쳐서 눈을 조금 찡그리며 내용을 확인했다. 어느 강의동 옆의 공중전화기 뚜껑을 열어보라는 내용이었다.
하편에 계속...
이웃 분들의 스라밸을 존중하기 위하여 짧게 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