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범의 비상.
그토록 오랫동안 우움츠렸던 날개~~~
신해철의 길 위에서, 황머시기의 나는 할 수 있어, 다시 신해철의 민물장어의 꿈, 강산에의 거꾸로~~연어처럼. 등등...
이런 자기암시적이고 열심히 부르기만 해도 자아가 실현될 것 같은 노래를 많이 불렀었다. 20대 때 얘기다. 일부러 찾아서 들은 건 아니고 멜로디에 혹했었는데 흥얼흥얼 따라 부르다 보니 그런 심각한 가사라는 걸 알았다. 완전 국내산 멜로디충이었던 나는 내 취향에 맞는 멜로디라면 노래를 가리지 않았다. 멜로디에 충실했던 가요에 주로 애착이 갔었다. 가사는 사람이라는 악기를 울리기 위한 매개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러나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는 말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20대가 훌쩍 지난 다음 그때를 돌아보면 두 가지 키워드가 생각난다. 자유와 이상. 나이가 상관있겠냐만, 황혼에도 그것을 찾거나 그 안에 머무는 사람이 없겠냐만, 자유와 이상을 도달해야 하는 목적지로 본다면 그곳을 향한 여정을 시작하는 곳은 20대의 어느 플랫폼이 적당하지 않겠나.
20대를 관통했던 내 키워드는 명확하나 그 실현에 있어서는 게으르기도 했다. 게으르다고 해서 20대의 팽팽한 태엽이 늦춰지지는 않았으므로, 당연하게도 시간은 갔다.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하루를 보냈고 시간은 충분하다는 안도감이 있었다. 졸업 후에는, 결혼은 할 수 있을까 또는 돈을 벌 수 있는 방법 같은 현실적인 문제와 싸우는 것이 일이었으니 다른 의미에서 보면 게으른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결핍해 보이기만 했던 그때는 내 여정이 어디로 향할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았다. 단지 막연하게 자유나 내 이상이 뜬구름이 아니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래서 '그토록 오랫동안 우움츠렸던 날개~~~'류의 노래들이 입에 착착 감겼는지도 모른다. 뭔가 이루기 위해 애쓰고 있지는 않더라도 그 길로 가고 싶다는 로망이 있었던 것일까.
자유와 이상의 실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여전히 그런 것을 소원하는 나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20대였다. 그 10년 동안 가끔은 치열했던 적도 있었다. 물론 아닐 때가 훨씬 길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저 얼레벌레 그 시절을 보냈어도 나에게 그 시간은 결국 각인의 시간이었다. 20대의 내 키워드가 아직 가슴에 남아 있다는 것은, 어떤 우여곡절을 겪었다고 해도 그때나 지금이나 내 근간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저 노래들을 부를 수는 없겠다. 그토록 오랫동안 움츠리고만 있던 날개가 관절염에 걸려 버렸기 때문이고 지친 어깨 떨구고 한숨 짓는 그대 같은 가사는 늙은 꼰대의 쫀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